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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달 3월과 국가안보
김 철 수 아동문학가·美솔로몬대학교한국학장
작성 : 2015년 03월 22일(일) 17:53 가+가-




어느덧 3월(March)도 하순에 접어들었다. 긴 동면을 끝낸 생명체들이 하나 둘 땅속에서 고개를 들고 나와 꿈틀거리는 생명의 약동이 시작되고 있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도 지났다. 3월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군신 마르스(Mars)로 바람의 달(March Wind)이라고 부르는데 봄이지만 아직 완전히 겨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분다고 하여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이라고도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는 실속까지 파고드는 꽃샘바람뿐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케 만드는 바람들이 계속 불어오고 있다. 특히 한반도를 북한의 미사일공격으로부터 막아낼 방어체제를 구축해야겠다는 미국의 사드배치에 대한 생각과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중국 측의 이해가 맞물려 그 중간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국익을 도모해야하는 처지가 된 우리정부의 난처한 입장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 마냥 조심스럽기만 하다.
6·25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국제시장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집계한 누적관객 1,400만을 돌파하여 지난 해 1,760만을 돌파한 명량에 이어 흥행 2위를 지키고 있는데 이 영화 한 편에 우리민족의 애환이 모두 들어있어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다. 특히 감동을 주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흥남대철수 때 한국의 쉰들러가 된 고 현봉국 박사에 대한 생명 중시와 동족구출사건이었다. 현봉국 박사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 옥정리 었다. 그가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마치고 평양기독병원에서 인턴을 끝낼 즈음 8·15 광복을 맞았고 그 후 고향인 함흥으로 의사생활을 하기위해 돌아왔는데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박해가 너무 심해 병원을 열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1907년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세운바 있던 윌리암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의 버지니아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2년여 동안 임상병리학을 공부하고 펜실바니아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중 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피범벅이 된 채로 병원으로 밀려드는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전쟁발발 3일째 되던 6월27일 자정 무렵 문창모 세브란스 병원장이 전 직원을 모아놓고 “북한 인민군 전차가 서울시청까지 들어왔으니 이제 부터는 각자가 알아서 활로를 찾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서야 현 박사는 자신이 월남자인데다가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더욱이 기독교인이니 인민군에 잡히면 영락없이 죽는다고 생각하고 병원 직원 두 사람과 함께 피신을 결심했다. 다행스럽게 그가 쉽게 피신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 신당동에 있던 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여동생만 살고 있었고 나머지 형제들은 군이나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어 그나마 부담이 적었다. 현 박사는 자신이 미국유학생활 중 터득한 영어로 조국에 봉사할 길을 찾던 중 황성수 국회부의장의 소개로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가 통역관으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11월 해병대사령부가 강원도 고성 지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참모장 김성은 대령의 권유로 다시 해병대에 근무하게 되는데 이 때 미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만나게 되면서 우연하게도 알몬드 장군과 동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해병대 통역관의 자리에서 미 10군단 인사부 고문으로 스카웃을 되어 미군부대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바로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그들의 포위망에 갇힌 미 해병 1사단과 한국 해병대, 그리고 한국군 3사단과 수도 사단, 미 육군3사단과 7사단 등 군 병력만 10만 여명과 수많은 피난민들이 흥남부두에 모여들던 때였다. 현 박사는 민간인들을 그대로 놔두고 떠나면 공산군들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어떻게 해서든지 이들을 싣고 떠나야한다고 알몬드 장군에게 애끓는 마음으로 간청을 하여 결국 배안에 있던 전차와 무기들을 다시 내려놓고 98,000여명의 민간인들을 태워 무사하게 구출하여 낸 역사적 사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뼈아픈 과거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바로 영화 국제시장이 주는 이 시대의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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