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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산행
작성 : 2014년 11월 18일(화) 17:05 가+가-
내가 속한 모임에서 번개팅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
중간 휴게소에서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속에 것을 다 토하는 버스멀미에 시달린 뒤끝, 미루고만 있던 만삭의 딸애 집을 다녀온 그 이박 삼일의 여독(旅毒)이 채 가시지 않은 다음날 오전의 출타라니. 잠시 망설여지긴 했다.
하지만 참여 독려의 전화를 하신 회장님의 성의도 그렇지만 ‘무등 산장의 원효사 입구’라는 집결지의 명칭도 뿌리칠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했던가. 참석의 문자를 발송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우리 두 사람 다 두더지 형 칩거파임이 분명했다. 머리에 은발(銀髮)을 흩뿌려 얹어주며 저만큼 달아난 무정한 세월 탓도 있었다. 거리에 나서자 둘 다 어리둥절, 스무 해여 학창시절을 보낸 토박이 출신들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낯선 풍경들이 이어졌다.
친절한 네비게이션 양(孃)의 호의마저 의심하며 행선지 향방을 갑론을박(甲論乙駁)하기 몇 번. 드디어 무등 산장 입구로 들어서자 안도감과 함께 터지는 탄성이다.
세상살이에 가장 어려운 게 시중(時中), 유효적절한 타이밍 맞추기라던데 자연은 어찌 그리도 제 시기를 놓치지 않는지. 만산홍엽(滿山紅葉)! 푸르던 초록은 제풀에 지쳐 산 가득 절경을 펼쳐놓았다.
청량한 가을빛에 형형색색을 떨치는 단풍이 눈을 매료시킨다.
게다가 폐부 가득 스며드는 달디 단 공기라니! 누가 무등산을 일러 어머니의 품이라 했던가.
꾸역꾸역 산의 품 자락으로 파고드는 등산객들의 행렬은 끝이 없다. 칠순에 이른 노래자(老萊子)가 색동옷을 입고 구순의 어머니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던 고사 속 노래자희(老萊子戱)를 떠올리는 옷차림의 인파들이다.
여기저기 연신 찰칵대는 카메라 소리도, 색 고운 단풍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행인들의 달뜬 호들갑도 내겐 흡사 옹알이며 꿀떡 꿀떡 젖 넘기는 환청으로 들린다.
자애로운 어머니, 산은 우리의 탁한 영혼을 말끔히 닦아 맑디맑은 유년의 본연(本然)으로 되돌려놓는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동요(童謠)를 애써 참는다.
제 나름의 어리광을 피우며 무등의 젖가슴 더듬는 무리들 속에서 내 얼굴도 천진하였으리라.
처연함까지는 아니었지만 마냥 허허롭던 젊은 날을 거친 내겐 등산의 경험이란 거의 전무했다. 까다로운 성격은 옷에 대한 고집도 편벽에 가까워 격 맞춘 정장도 No다. 이제는 너나할 것 없이 일상복이자 외출복이 된 등산복이나 운동화 또한 내 취향이 아니라며 손 내저었다.
하니 운동화나 등산복은 구입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간혹 생겨도 남에게 주어 버리고 마는 품목이었다.
이 번개모임이 애초 산행목적이었음을 알렸다면 지레 포기했을 게 확실하다.
원효사 가까운 여느 식당의 점심모임이려니 짐작하며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선 산행. 아닌 게 아니라 등산화 아닌 굽 높은 부츠로 감행한 산길은 발톱이 슴벅거리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무등의 품에서 머문 하루가 내 생에 주어진 뜻밖의 보너스처럼 오달졌다. 감탄 부호 세 번으로 풍악(楓岳)의 금강산을 표현한 옛사람이 있었던가.
몸에 배인 붉디붉은 무등산의 단풍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이 무슨 우연일까. 머리맡에 놓인 이틀 쯤 묵은 신문을 펼치니 어느 목사님께서 쓴 ‘무등산 가을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제는 목회자로 성공했지만 건축현장에서 노가다 질통을 짊어졌던 각박한 시절도 거쳤다는 목사님. 리어카를 끌고 오이장사, 수박장사로 골목길을 전전하던 그 시절,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더더욱 고달팠던 신학생에게 무등산은 통성기도의 장소 겸 푸근한 안식처가 되었더란다. ‘내 생이 마감하는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는 무등산을 향한 고백으로 시작된 목사님의 글을 꼼꼼히 읽는다.
우리 생의 어두운 날 사람에게만 기대는 건 아니었다. 그 분께 무등산은 어느덧 초심(初心)을 다잡는 장소로 자리 잡았단다. 어제를 반추하며 되걸어보는 단풍 찬란한 무등산 자락, 그 여정이 훈훈하다.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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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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