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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작성 : 2014년 11월 11일(화) 17:25 가+가-
바짝 다가온 한기(寒氣), 올 들어 최초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는 뉴스다. 가을볕살 눈부신 남향 마루가 생의 축복처럼 감사한 아침, 난로에 마른 나무들을 집어넣는다.
온 몸 가득 퍼지는 온기에 떠오른 것은 ‘혜택(惠澤)’이라는 단어다.
‘은덕의 물가’, 어디선가 나를 지지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따스한 눈길 닮은 햇살이 은은한 물살처럼 번지는, 먼 곳 누이의 소포가 올 것 같았던 가을날도 시나브로 막바지로 치닫는다. 몇 자 적은 피붙이의 답신에 뚝뚝 눈물 흘렸을, 그 얼룩이 역력한 누이의 이런 답장에선 납월의 정취마저 묻어나는 11월.

네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위에 누웠던 항라(亢羅) 하늘도 한 움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 간 발자국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있다. 수면의 물거울을 걷어낸 보자기 속은 흰 낮달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새순처럼 하늘거렸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곁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운문보(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유금(遊禽)이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향념(向念)

송재학 시인의 ‘늪의 내간체를 얻다’를 읽으며 불꽃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타드락 타드락, 제 생의 마지막을 어찌 한 마디 없이 넘기랴. 소신(燒身) 중인 나무가 내는 가벼운 신음에 연이어지는 11월의 풍경이다.
따뜻한 온기 풍기는 불기와 친숙한 계절 11월. 하지만 도회에선 불꽃을 만나기가, 아니 피우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나간 초겨울의 강가에서 함께 간 아이들은 불장난에 그저 신이 났다.
살얼음 낀 강물에 이제 그만 멈추어 서서 다가오는 겨울을 견디기로 작정했다고 표현한 시인의 문장이 당차다. 강가에 무성하던 풀들조차 저들의 마른 생애를 남기고 사라진 입동(立冬)의 계절, 그 불에 온갖 삶의 비결(秘訣)과 도참(圖讖)이 적힌 책자들을 사루겠다고도 했던가.
이제는 돌아올 수 없이 멀어진 생각들, 비망록에 적어 둔 새해 초두(初頭)에 세웠던 하 많은 계획들도 한 때 불꽃처럼 타오르던 구절들과 함께 타들어간다.
올해 나는 무엇을 꿈꾸었나. 시의 강가에서 빠져나와 내 생의 바스라진 꿈 조각을 어루만진다. 맞아. 수놓는 일, 바느질은 평소 내가 바라마지 않는 작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골집을 짓고 엉덩이 붙이자마자 시도했던 것이 물들이기와 수놓는 일이었다. 붉은 비단치마를 뜯어 방석을 만들고 의자 등받이에 봉숭아물을 들인 덮개를 씌웠다.
귀퉁이 실밥을 바늘로 뺀 무명천에 제비꽃 몇 송이 수를 놓은 차받침도 만들었다. 스무 해 전이니 천연염색이 지금처럼 채 각광 받지 않았던 시절이라 누군가는 파격적 작품이라며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었는데….
하긴 그런 호들갑만 떨었었나. 대나무 문살에 붙인 나비들, 들길의 갖가지 풀들을 동원해 만든 액자도 서너 점이었다.
엄마의 베 짜던 시절 얘기를 듣던 저녁처럼 고즈넉한 시절이, 언젠가 반드시 올 나의 참다운 시절이 오면 유용하게 쓰이리라 고대하며 십 여 년 넘게 비축해 두었던 무명천들에서는 어느덧 곰팡이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꽃잎과 구름과 새….
바늘자리마다 통증 일던 젊은 날, 그런 상처들이 딱지 앉아 잠잠해지는 날이 당도하면 흰 광목천들을 색색으로 염색해 작은 새나 꽃 따위를 꼼꼼히 수를 놓은 다음 가벼운 풀을 먹여 다림질로 마무리하리라. 만용에 가깝겠지만 아끼는 한시 한 구절도 헝겊 귀퉁이에 손수 적어 보리라던, 부녀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서체라는 내간체(內簡體) 닮은 수예품을 올해는 기필코 완성해 보리라고 기대했었다.
그 조촐한 계획들마저 내게는 아득한 일이었던가. 뒤척이는 불 꼬챙이에 걸린 마지막 한 페이지처럼 달랑 한 장으로 남은 달력, 11월이 어느덧 중순이다.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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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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