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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작성 : 2014년 11월 04일(화) 16:48 가+가-
흡사 눈발 날리는 을씨년스런 역 입구에 내려선 느낌이랄까.
스무 해 넘도록 맺어 온 인연과의 돌연한 괴리, 뜻밖의 선로 사고다. 치미는 답답함에 기차의 소음 닮은 비명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
몇 해 전이다. 어느 모임자리에선가.
떠들썩한 뒤풀이 술자리에서 유난히 말수 없던 중년의 신사였다. 그가 엮은 망부사(亡婦辭)의 책자를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다. 환갑의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내를 회억하는 작은 책이다.
구구절절 먼저 떠난 짝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헌정(獻呈)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아내가 부러웠다.
된장국 한 숟갈 받아먹어주는 아내가, 한 오라기 실 가닥처럼 마른 목의 아내가 짓던 힘없는 미소 한 번에도 눈물이 날만큼 감사하고 고마웠다던 그는 평소 아내가 좋아하던 그리스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를 책명으로 삼았다.
언제 옮겨 두었을까. 내가 비망록 삼아 들고 다니는 노트의 표지 뒷면엔 아침 8시 48분 남평역에서 출발하는 간이 열차의 경유지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다도실, 이벤트실이 갖춰져 있다는 특별열차다. 작은 간이역인 남평역에서 출발해 득량, 보성, 벌교, 순천, 하동, 북천을 거쳐 진주역이 종착역이다.
경유지의 어디에서든 내려 그 곳을 여유롭게 즐기고 회선하는 그 기차를 타고 되돌아오면 저녁 9시 40분. 아직도 승차하지 못한 그 기차. 녹차의 고장에 사시며 귀농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해주시던 정 선생님의 가족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을까.
나는 종착역인 진주가 아닌 하동에 붉은 동그라미를 둘러놓았다.
숱한 만남과 이별의 장소인 기차역. 질주하는 KTX 속도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굳이 바란다면 비둘기호, 무궁화호 같은 이름의 기차들을 타고 코스모스라던가, 금잔화, 샐비어 같은 꽃들이 도열하듯 역사(驛舍)와 철로 주변에 만발한 간이역에서 하차하고 싶다.
가끔 깃대로 승객의 안전을 챙기는 역무원은커녕, 곳곳에 오물투성이 쓰레기가 나뒹굴고 어디선가 노상방뇨의 냄새까지 풍기는 폐쇄직전의 역사 풍경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간이역, 그 이름만으로도 나는 설렌다.
우리네 인생 역시 수많은 간이역을 거친다. 숱한 인연과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어지는 생의 매순간이 간이역.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로멘틱 열차, 데이트 열차 등등으로 운용되는 특수 열차를 비롯해 그 어떤 종류의 열차에도 발매 가능한 게 왕복 티켓이다.
하지만 생이라는 기차의 승객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단 한 장의 열차표, 그 기차에서는 제아무리 날고뛰는 인맥을 동원해도 왕복표 구입은 불가하다.
그 어떤 기미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 어제 일은 내게는 생각지도 못한 선로사고다. 오랜 지인과의 불협화음이야말로 선로에 뛰어든 불청객으로 발생한 정차음 요란한 탈선사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게 여행지의 사고와 인연의 향방인가 싶다.
쉽게 매듭 풀리는 작은 오해? 그것도 아니다. 예리한 칼끝처럼 나를 후비는 상대의 말들로 인한 상처가 꽤나 깊다.
다정히 함께 했던 숱한 날들이 차장 밖으로 스치는 풍경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흥미진진한 삶,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게 탐정소설이라던 아가사 크리스티.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나에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져 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라던 애달픈 가사가 불현 듯 떠오르는 지금, 섣부른 화해시도는 하고 싶지 않다. 이 고약스런 간이역의 풍경은 짐짓 고개 돌려 외면하고프다.
때는 바야흐로 고운 단풍 즐기는 생의 만추지절(晩秋之節), 앞으로 경유할 간이역의 더없이 아름다울 풍광들을 기대하며 지금은 느긋이 미스터리 소설이나 탐독하련다.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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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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