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시민 4만여명이 1980년 5·18민중항쟁의 역사적인 장소인 광주 금남로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5번째 촛불을 밝혔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매서운 추위도 국정농단 사태의 국민 분노를 막진 못했다. ‘국정농단 헌정파괴 박근혜 퇴진 광주운동본부(준)’는 26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5차 박근혜 퇴진 광주시국 촛불대회’를 열었다.
비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도 이날 오후 8시 기준 주최 측 추산 4만여명, 경찰 추산 1만2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정당인, 농민, 종교인, 시민사회단체 구성원, 직장인, 대학생, 수능을 마친 수험생, 중·고등생, 초등학생은 물론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정주부들이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박근혜 퇴진’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회는 문화공연에 이어 개회선언, 민중의례, 대회사, 자유발언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지난 19일 36년 만에 횃불을 들었던 광주 시민들은 이날 횃불 대신 ‘우리가 주인이다’ ‘박근혜 체포’ 등이 적힌 대형 걸개 퍼포먼스를 벌였다. 또 참여자들을 2개 조로 나눠 광주천변로와 대인교차로 두 방향으로 촛불 대행진에 나섰다.
촛불 집회에 앞서 청소년들은 금남공원에서 시국대회를 열고 국정농단 사태를 비판했으며 조선대학교 민주동우회는 조선대에서 금남로까지 시국 촛불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박근혜 체포’ ‘박근혜 OUT’ ‘이게 나라냐’ ‘국민의 명령이다. 퇴진하라’ ‘엄마가 말(馬)은 못 사주지만 바른 세상 만들자’ ‘밥하다 나왔슈, 착한엄마’ ‘엄마 망신 그만’ 등 손 피켓을 들어올렸다.
또 최순실은 물론 박 대통령과 사태를 키운 새누리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나주에서 아내와 촛불집회에 참석한 정명진(48)씨는 “촛불집회에 처음 참석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비도 오지만 모여서 (나라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는 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처음으로 집회에 참여한 재수생 안지수(20·여)씨는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시국을 보고 저라도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며 “버티는 대통령을 보면 너무나 답답하다. 자리에서 내려올 때까지 시민들과 힘을 모으겠다”고 강조했다.
역사 국정교과서 반대를 외치기 위해 교사와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전남대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현직 역사 교사들과 예비 교사, 재학생 등 100여명은 이날 집회에 참석해 “역사 국정교과서 폐기”를 외쳤다.
광주교대 학생들도 집회에 참석해 ‘역사 국정교과서 폐기’에 힘을 실었다.
아이들을 위해 ‘유모차 부대’도 촛불을 들었다. ‘유모차 부대’는 보통 아이와 엄마의 상징인 유모차를 끌고 나오거나 아기 띠를 매고 나온 엄마들을 일컫는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본격적으로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유모차 부대’는 세월호 참사를 거쳐 평화 시위와 전 국민적 분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비가 내리는 추위 속에 비옷을 입고 촛불을 들고 아이들과 금남로에서 ‘박근혜 구속’ ‘박근혜 퇴진’을 외친 이들은 “우리 아이들을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 나왔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흰 가면과 금색 왕관을 쓴 ‘엄마 부대’는 “이게 나라냐”를 함께 외쳤다.
광주지역 엄마들의 모임인 ‘착한 엄마’ 회원 20여명은 이날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닷’ ‘밥하다 나왔슈’ ‘엄마가 말(馬)은 못 사주지만 바른 세상 만들자’ ‘엄마 망신 그만’ 등의 손 피켓도 흔들었다.
이들은 “진짜 밥하다 나왔다. 너무 답답해서 우리 스스로 자녀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의, 순실의 시대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만큼은 지켜주고 싶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 숭일고 학생 30여명은 ‘5차 박근혜 퇴진 광주시국 촛불대회’가 열린 광주 금남로 주 무대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메인 넘버인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를 개사한 노래를 선보였다.
1~2학년 학생들은 ‘자 우리가 내리자 심판의 시간이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학생의 노래. 더 이상 국정농단 볼 수 없다 외치는 소리. 대한민국 요동쳐 학생이 힘을 보일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고 노래했다.
이어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 하나. 저 파란 지붕 너머 민중을 위한 세상. 다 함께 외치자 박근혜 퇴진하라’고 외쳤다.
이들은 ‘민중들이 외치고 우주가 도와줄 때에 비로소 민중 위한 나라가 오리라’는 노랫말로 끝을 맺었다.
학생들은 이날 공연을 스스로 제안하고 “학생들이 힘을 보태 잘못된 국정을 바로 잡기 위해” “대통령이 민중의 목소리를 듣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직접 가사를 지었다.
지난 집회에 이어 국정농단 사태를 풍자하는 각종 패러디가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를 끈 것은 길거리 음식으로 등장한 ‘오방빵’.
오방빵은 1980년대 거리에서 팔던 붕어빵과 비슷한 종류의 먹을거리다. 하지만 시민들은 “최순실의 오방색과 무속신앙을 연상시키는 먹을거리가 등장했다”며 환호했다. 지난주 집회에 이어 죄수복을 입은 최순실이 다시 등장했으며 ‘박라임 퇴진’이 적힌 플래카드, 배지(badge), 스티커, 핫팩 등 이른바 ‘박라임 4종 세트’는 지난주 1만원에서 5000원으로 가격을 낮춰 재등장했다.
광주 동부경찰서와 광주시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지난 5일부터 이날까지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다섯 차례 촛불집회 기간 단 한 건의 사건·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기간 금남로에 주최 측 추산으로 이날 4만명, 지난 19일 10만여명 등 모두 16만여명이 촛불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36년 만에 옛 전남도청 앞에 횃불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경찰은 ‘불법 시위가 아니다’고 잠정 결론지었다.
경찰 한 관계자는 “주최 측은 물론 시민들이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며 “광주정신을 보여 준 것 같다”고 평가했다.
전남 22개 시·군 가운데 18곳에서도 주최 측 추산 5만명이 촛불을 들어올렸다. 국토의 최서남단인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이 밝혀졌다. 14개 섬마을 주민 100여명은 ‘박근혜 퇴진, 이게 나라냐’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어 보이며 구호를 외쳤다.
주민들은 이어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정권 분노에 대한 심정을 자유발언을 통해 표출했다.
/강성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