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국가정보원 사태를 보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자결한 직원 임모씨가 가족에게 남긴 유서다. ‘웃는 모습이 예쁜 우리 아기. 고3인데 힘들지?... 좀 더 친근한 아빠가 되지 못해 미안하다.’ 부인과 두 아이, 그리고 부모에게 차례로 남긴 그의 작별 인사를 보면서 나는 낙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 같은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의 해킹 의혹 규명을 놓고 여야가 팽팽하게 맞서 이 문제가 정쟁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야당은 국정원의 모든 사무실을 조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보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사소한 사실조차 새나갈 경우 자칫 적에게 유용할 수 있는 게 정보세계이기 때문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1970년대 말 덴버대 박사 과정 학생일 때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건물의 창문 숫자를 바탕으로 조직 규모를 거의 정확하게 추정했다. 간부에게는 창이 있는 방을 주는 소련 관료주의에서 유추했다. 미국이 소련을 무너뜨리는 데는 이 같은 정보 우위가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 국민을 지켜야 할 국정원이 어쩌다 정쟁의 한복판에서 허우적거리게 됐을까. 야당은 과거 댓글 사건을 근거로 국정원이 선거와 정치에 개입한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정보기관이 제대로 된 철학 없이 정권에 줄을 댄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정보세계에 정통한 익명의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결과 정보기관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국정 최고책임자의 정보기관에 대한 철학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기관은 국민과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정보 수집과 정세 판단을 맡은 조직이라고 본다. 정권에 대한 충성보다 한 차원 높다. 국민이 이기적인 정치권보다 희생적인 정보기관을 더 믿고 지지할 수도 있다.
정권과 정치권이 정보기관을 소중하게 대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이다. 해외 정보.공작 조직인 모사드에서 1949년 이래 모두 11명의 국장이 평균 6년 이상 재임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업무 연속성을 보장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켜줬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어떤 정치지도자도 모사드의 보직들을 정권의 전리품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국장부터 현장요원까지 철저하게 전문직으로 인정해왔다. 따라서 모사드 출신 정치인은 있어도 정치인이나 총리의 심복 출신 모사드 국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정권이 교체됐다고 국장이 바뀌지 않았다. 9대 수장인 에프라임 할레비는 98년부터 2002년까지 재임하며 세 명의 총리를 모셨다. 중도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정권(96~99)에서 시작해 중도좌파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 정권(1999~2001)을 거쳐 다시 리쿠드당의 아리엘 샤론 총리 정권(2001~2006년)까지였다.
정권과 총리가 한 바퀴 돌았지만 모사드 수장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99년 좌우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정치권은 모사드를 손대지 않았다. 정권이 아닌 국민과 국가를 지키는 정보.안보 조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10대 수장인 메이르 다간은 2002년부터 2011년까지 98년간 자리를 지냈는데 아리엘샤론(2001~2005년 리쿠드당, 2005~2006 우파 카디마당), 베냐민 네타냐후(2009~리쿠드당) 세 총리를 모셨다. 우리나라는 민주화가 이뤄지고 국회의 합법적인 감시가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정보기관에 대한 과다한 의심이나 모욕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당이 현장조사를 기피하며 다른 요구를 들고 나온 건 잘못이다. 검찰수사 요구도 현재로선 설익은 주장이다.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도입으로 누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에 나설 법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해킹 프로그램 이용 내역과 임씨가 삭제한 내용을 정보위에 보안을 전제로 낱낱이 공개해 의옥을 말끔하게 해소해야 한다. 끝 모를 불신을 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국정원 당국은 하루 속히 신뢰(信賴)를 회복해야 한다. 정보기관의 정상활동이 위축되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국정원은 국민을 생각하며 ‘신뢰 회복 5개년 계획’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 고립무원을 없애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