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국회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왔다. 굳은 얼굴의 유원내대표는 사퇴서를 꺼내 “내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번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표현은 비수를 숨긴 메타포가 있는 사퇴의 변이다. 너무나 과한 말이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시위대가 “이명박 정권이 독재를 하고 있다”며 수없이 외치던 구호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국민들이 심판해 달라”며 거부권을 행한 지 13일 만이다. 이로써 극한 대결로 치닫던 거부권 정국도 일단락됐다.
‘메르스와의 전쟁’ 와중에 터져 나온 거부권 파문은 당.청 간, 행벙부와 입법부 간 대화의 단절을 불렀고, 국민들은 불안해 했다. 우리는 참 잘했다고 본다. 만시지탄이 없지 않지만 일단 정국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게 된건 다행이다. ‘가화(家和) 만사성(萬事成)’이 그것이다.
이번 사태의 직접적 발단은 유 원내대표가 5월 29일 공무원 연금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국회법 개정에 합의한 것이다. 공무원연금 개편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가 야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청와대와 소통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에도 협상 내용을 제대로 알라지 않았다. ‘돈단’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유 원내대표가 내세운 ‘공정하고 따뜻한 보수’는 고위 정치인이 가질 수 있는 소신이라고 본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처럼 대통령의 정책 방향을 굳이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쌍방향 대화보다는 일방 통행식 지시와 보고에 익숙한 박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도 문제지만 사전 조율 없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국정 노선과 다른 얘기를 하는 집권당 원내대표의 모습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국정을 함께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가 반목함으로써 국민을 실망시키고 불안하게 했다. 당사자들의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감정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친박-박계가 내년 총선의 공천을 놓고 다시 충돌할 수도 있다. 공천 갈등까지 겹칠 경우 박 대통령의 국정 개혁 과제는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 집권 3년 차를 맞은 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와 공공.노동.금융.교육등 4대 개혁을 강조했지만 어느 것하나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내년엔 ‘국정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총선이 예정돼 있다. 앞으로 6개월이 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대통령이 힘을 발휘해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집권당의 뒷받침과 국회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국정 정상화를 위해 합심해야하는 이유다. 그러기 위해선 박 대통령은 꽉 막힌 당.청 간 대화 채널을 복원해야 한다. 50일 넘게 공석인 정무수석을 하루 속히 임명해 소통과 공백을 해소해야 한다.
새 정무수석은 무엇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행정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화론자, 화합론자를 기용하는게 좋다고 본다. 박 대통령은 지금부터 권력 정치에서 벗어나 민생(民生) 정치에 올인해야 한다. 필요하면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과 노조 등 이해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여기야말로 대통령의 권위와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야당은 국회선진화법의 칼자루를 쥐고 세월호 조사위의 과장 하나 바꾸기 위해 국회법 개정을 고집했다. 그래서 결국 ‘유승민 분란’을 만들었다.
여권의 자중지란을 반사이익이라며 즐기는 듯하다. 우리 국민은 다 지켜보고 있다. 야권은 국민의 정치 수준이 많이 높아졌음을 알아야 한다. 야당이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면 다음 총선에서 또 한 번 놀라운 결과를 받아들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도 국정 운영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당.청 간의 불협화음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겨야 한다. 또한 소통을 해야 한다. 소통은 대화 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종일 국가를 생각하는 여대통령임에는 틀림 없다. ‘인자하고 소통하는 여대통령’이기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