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여섯 번째로 총리감을 찾고 있다고 한다. 사퇴 압박을 받아 오던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는 바람에 정부가 어수선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23일 두 번째 방문지인 페루에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죽음과 그가 남긴 리스트로 인한 국정이 흔들리지 않고 국론분열과 경제살리기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내각과 비서실은 철저히 업무에 임해 주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국정 수행이 차질 없게 이뤄지려면 신속한 후임 총리 지명으로 공백과 누수를 최소화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박대통령의 귀국(27일)이전이라도 후임자를 발표한다는 각오로 인선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고 경제 살리기와 공무원 연금 개혁.노동 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이어갈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총리 후보 지명사는 그 자체가 총리 잔혹사다. 온전히 취임했다가 물러난 총리는 정홍원 전총리 한 명뿐이고 이완구 총리도 성완종 게이스트로 약 두 달 만에 사의를 표했다. 박 대통령이 지명한 다섯 명의 총리 후보 중에 3명은 인사청문회도 가보지 못했다. 이젠 총리 후보자라는 말만 들어도 ‘낙마’라는 말이 연관 검색어처럼 떠오른다. 이렇게 해서까지 총리를 뽑아야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사의를 표한 이완구 총리가 평상복 차림으로 총리 공관 마당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등장했다고 한다. 그날 박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이었고, 경제부총리는 총리 직무 대행이 돼 국무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 희한한 국정 리더십 공백의 장면은 우리에게 정말 총리가 꼭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점을 시사한다. 우리 한국에서 총리란 될 때만 시끄럽지, 되고 난 뒤엔 대부분 존재감이 약해진다.
우리나라에선 총리가 꼭 필요했던 순간에 총리라서 이룰 수 있었던 성과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헌법상 국무총리에게는 대통령에 이어 국정의 제2인자로서 행정부를 통할하는 권한, 국무위원의 임명 제청.해임 건의권 등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역대 총리 중 몇 명을 제외하고 이런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 경우는 드물었다. 총리란 자리의 태생적 애매함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총리는 영국과 같은 내각제의 총리와 다르고, 미국의 부통령과도 다르다.
애당초에 내각제의 핵심 요소인 국무총리를 대통령제 국가에 심다 보니 제도가 모호하고 운용도 애매했던 것이다. 그동안에 총리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일을 대신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다. 같은 대통령제의 2인자라도 미국의 부통령은 좀 다르다.
미국은 왕정과 달리 대통령 유고시 권력 계승자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통령제를 만들었다. 부통령은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당선되지만 뚜렷하게 어떤 역할이 기대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배경 때문이다. 미국에선 대통령의 책임은 대통령이 지고 있다. 실질적 권한도 없는 부통령이 대신하는 일은 없다. 좋은 제도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총리를 누구 시키느냐에 달렸다. 후임 총리 인선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덕목은 도덕성이다. 따지고 보면 이 총리가 사건 발생 12일 만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느냐는 실체적.법리적 문제보다는 정직성의 결여가 결정타였다. 이 총리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드러날 거짓말을 하다가 국민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높은 도덕성과 함께 요구되는 자질은 개혁성이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를 뒤흔든 ‘성완종 리스트’ 스캔들은 더 이상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적폐가 쌓여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민심의 변화를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과거를 따지지 말고 진영을 무시하는 새로운 인사의 기준이 필요하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국민이 원하는 인물을 찾아서 과감하게 기용해야 한다. ‘수첩’을 덮고 도덕성과 개혁성을 갖춘 인물을 찾아야 한다. 돈을 돌멩이처럼 여기는 때묻지 않은 인물을 발굴해야 한다. 이런 인물은 하늘이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도 구하면 얻을 것이다. 진영을 초월해 최선의 인물을 기용하고, 상당한 권한을 준다면 박 정부가 위기를 돌파하고,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도 원활해질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실패할 여유가 없다. 박 대통령은 마음을 비우고 후임 총리 인선에 심혈을 경주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