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 몇 해 두고 미루고만 있던 집 단장을 하고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 ‘가을 단장(丹粧)’하자 스치는 웃음이다. 십여 년 전 한국어문학회에서 주최하는 한자 일급 시험에 응시했을 때다. 술술 답안지를 작성해가다가 덜컥 제동이 걸린 게 ‘단장’이라는 그 쉬운 한자였다.
본디 나라는 사람이 꾸미는 행위 자체에 소질이 없어서였을까.
쩔쩔거리다가 시험지를 제출하고 말았으니 얼굴, 머리 옷차림 따위를 곱게 다듬는 행위, 또는 건물, 거리 따위를 손질하여 꾸미는 행위를 이르는 단장(丹粧)이라는 낱말을 내 어찌 잊겠는가만 실천엔 여전히 게을렀다.
돌이켜 보면 서른 해 남짓 나는 기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리 살아도 되는 것인가 자꾸 뇌이면서도 삶이란 내 능력으로는 감히 풀 수 없는 신의 암호라 치부했다. 그저 제 자리에서 제 몫이나 열심히 감당하자, 마치 고분고분한 나사처럼 정과(定課)된 운명에 순명(順命)하리라던 서글픈 체념이었다.
집과 여자는 가꾸기 나름, 특히 집은 주인의 손길을 많이 탄다. 매일같이 쓸고 닦는 건 기본, 애정을 가지고 돌봐야 그 수명이 길어진다. 그런데도 차일피일, 무려 스무 해 이르도록 미루었던 내 집을 단장한 감회가 크다.
가느다란 실비에도 고스란히 비를 맞던 가여운 목재 문! 그것이 가장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방문객 모두 흙신발을 들고 내 집 마루로 들어섰던 건 신발을 물어뜯던 개구쟁이 개의 소행 탓만은 아니었다. 긴 차양을 내고 내킨 김에 네 쪽 창문을 통유리창으로 갈아 끼우자 우와! 한 눈에 들어오는 뜰과 장독대, 그리고 앞산이 그야말로 시원하다. 하지만 이리 잠이 오지 않는 건 통유리창의 감격, 그 여파만은 분명 아닐 게다.
신영훈 대목이 불란서에서 한옥을 지을 때였다. 창문에 한지 대신 유리를 끼워야한다는 불란서 측 건축가의 단호한 주문이다. 설왕설래, 설득을 시작했다.
“잘 때 눈을 감고 자는 것은 휴식을 위한 것이지요? 유리를 끼우라는 것은 눈을 뜨고 자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는지요? 꼭 내다보며 살아야 할 일이 없다면 보지 않고 사는 것도 인간에게는 중요합니다. 보지 않고도 소리만으로 남이 찾아온 줄 아는 경지가 된다면 그 또한 인격함양에 좋은 것 아니요?”
끝까지 상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서양 건축법에서는 보이는 창의 수에 따라 집의 규격을 가늠하는데 창호지를 바르면 창인지 벽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할 수 없이 창호지 바른 미닫이 밖으로 유리창을 한 겹 더 만들어 달고 말았단다.
화재 시 한옥은 목재가 타다 말면 고만이지만 양옥에서는 화학물질이 내뿜는 독성으로 질식해 죽는 경우가 많다. 하여 갈수록 기능보다는 무공해 자재 쪽으로 확산되는 게 세계 건축시장의 추세다.
사람의 기가 쇠잔해지는 것도 모두 산천정기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라는데 다행히 내 집은 한옥이고 방마다 한지로 창을 바른들 그 누가 딴지를 걸겠는가.
지금은 아득한 유년시절, 하늘색이 짙푸르러지고 창밖에선 귀또리 울음소리가 시작되고 청자갈 마당의 과꽃에 뭉툭뭉툭 꽃몽우리가 잡히기 시작할 즈음이면 벌어지던 불로동 집의 거사(巨事)였다. 일하는 언니들은 연탄불을 내어 찜통 가득 밀가루 풀을 쑨다. 수북한 높이로 쌓인 종이의 마름질은 변함없이 아버지 차지. 서른 개 가까이 되던 방의 문짝들은 모두 떼어져 우리들의 물세례를 받았다.
우리 세 자매가 서서히 지쳐갈 무렵이 돼서야 끝이 났으니 말끔한 도배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너끈히 소비되었을 것이다. 한바탕 소동 끝 아직도 눈에 선한 남향방의 너른 한지에 어룽거리던 긴 가을 햇살의 고즈넉함!!
이제 내 삶에도 평화로운 물길을 알려주는 해도(海圖)를 한 장 얻었을까.
‘달빛이 창에 기득하니 시를 향한 마음은 차갑고/이슬이 베개 가에 가득 퍼지니 꿈속의 혼까지 맑아라(月色滿窓 詩骨冷 露華方枕 夢魂淸)’. 은은한 달빛의 기척에 딸의 편액 구절이 새삼 가슴에 스민다. 저마다 차마 눈감기 싫은 밤이 있다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환하게 불을 켰다. 마치 새 집인 양 참신해진 내 집은 무엇보다도 새로 바른 한지의 효과려니 갈수록 청아(淸雅)로 치닫는 마음은 머리맡 시집을 당기게 한다.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