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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
작성 : 2014년 08월 26일(화) 17:44 가+가-
발표가 하루 늦춰졌단다.
하지만 말 그대로 요식(要式)일 뿐이라니 사건의 개요는 이미 판정이 난 셈이다. 흥미진진한 가십을 넘어서 가히 충격적인 검사님의 일탈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6차선 대로변에서 벌인 퇴폐공연의 주인공은 끝없는 거짓말까지 양산하는 통에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주먹을 휘두를 자유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상대방의 코앞에서 멈춘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올리버 웬델 홈스 판사다.
미국의 법률체계를 확립한 법관이라 숭앙 받는 법조인이다. 이 또한 홈스판사의 강연 한 대목이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극장에서 거짓으로 “불이야!”하는 거짓말로 광란을 야기한 사람은 법으로 보호할 수는 없다.
모든 사례에서 문제는 실체적인 악을 가져올 명백하고도 실재하는 위험을 지닌 상황인가 혹은 그런 의도를 지니고 이루어졌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이미 유명세를 탄, 그 이름도 들먹이고 싶지 않은 검사님도 푸른 법학도 시절 분명 이 명 강연을 읽으셨으리라.
홈스판사는 그 어떤 생의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
남북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을 했으며 매사추세츠에서 판사를 거쳐 대법관을 역임하는 등. 인생이란 ‘행동과 열정’이라는 신념에 걸맞게 살았다. 마지막 찾아온 죽음마저도 옛 친구인양 순순히 받아들였다. 만약 신이 5분밖에 안 남았다 선언하신다면 ‘좋습니다. 10분이 안되는 게 유감이지만’ 이렇게 맞이하겠다는 농담도 했다. 신념을 가지고 미지의 세계를 추구한 큰 사람이었던 홈스판사는 죽음에 맞서는 어떤 징후도 없이 아주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상반된 두 법조인을 비교하는 사이 다시 스쳐가는 불유쾌한 기억이다.
시골 마을의 아침 일곱 시는 어두침침하다. 출근하는 딸을 보내놓고 마루 끝에서 나쁜 시력 탓에 이맛살 찌푸려가며 도로변을 주시하는 나다. 그렇게 지켜보는데 그날은 웬 정체불명의 검은 승용차가 딸 앞에 멈추었다. 멀리서 보아도 앞 창문을 여는 기척이다.
얼마나 머물렀을까. 버스가 당도하기 직전 검은 차는 떠났다. 퇴근해 돌아온 딸내미의 자초지종에 나는 기겁을 했다. ‘창문을 열고, 바지 지퍼를 내리고…’ 딸의 말이 더 걸작이다.
제가 놀래면 나쁜 놈이 더 재미있어 할 것 같아 멀찌감치 떨어져 짐짓 강물 쪽만 바라보며 외면했다나.
마르고 작은 체구가 어찌 인물 판단의 기준이 되랴. 하지만 화면 속 검사님은 왜소하고 초라한 중년남자, 그것도 파렴치한 범인의 행색이었다.
취재진의 집요한 질문세례에 허둥거리는 화면은 흡사 범죄재연 프로를 연상시켰다. 나약해빠진 한 인간에 대한 동정심까지 일었다.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명망의 탑이 안타깝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날까 삼가서 행동한다는 신독(愼獨)까지는 무리였다고 치자. 하긴 제 집 침실에서 발가벗고 공중제비를 돈들 그 무슨 흉허물이 되겠는가. 저녁식사 후 산보는 일상에 지친 영혼을 정화시키는 데 유용한 시간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관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상식 이하의 공연(?)을 하는데 소비했단 말인가. 해프닝치고는 도가 지나쳤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직장을 가졌다고 최고의 지성(知性)은 아니었다.
고위 공직자로서 과중한 책임감이, 아니면 그 어떤 개인적인 삶의 부하(負荷)가 그를 짓눌러 그런 파행으로 내몰았을까. 끊임없이 발길질하는 삶의 가혹한 행패에서 자유스런 사람은 없다.
인류사에 뚜렷한 행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밀려오는 번뇌에 신음했지만 끝까지 싸워 그것을 극복한, 욕망 앞에 갈팡거리는 자신과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생 앞에 우리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바친다.
그런데 잘났다. 정말!!! 얼치기 영웅들이 저지른 이런 만용에 어찌 안심할까.
언제 어디서 또 한 대의 검은 승용차가 등장해 우리를 혼비백산 시킬지.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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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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