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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작성 : 2014년 07월 15일(화) 17:10 가+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의례처럼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넉넉한 두 숟갈, 그것도 티스푼이 아닌 밥수저로 듬뿍! 시골 장터의 싸전에서 잡곡류를 계량할 때 욕심껏 되에 담아 주르륵 흘러내리듯, 말 그대로 넘칠 듯한 그 고봉(高峯)의 양이어야 한다.
거기에 향을 가하는 헤이즐럿 한 숟갈에 차가운 우유를 반 컵 섞어 완성시킨 미지근한 커피다.
달콤함은 제로, 흡사 역한 니코틴 맛을 연상시키는 쓰디 쓴 맛은 우유로 순화시킨다. 찬 우유로 노리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다.
뜨거움을 천천히 식혀가며 마실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누리지 못했던가.
그러다 보니 커피는 물론이요. 국도 밥도 뜨거운 것은 손 내젓는 취향이 굳어졌다. 단숨에 후루룩 마셔도 딱 좋을 온기를 지닌 커피는 악마처럼 쓰고 유혹처럼 달콤하고 사랑처럼 뜨거워야한다는 커피예찬론을 저 멀리 비껴간다.
스물한 살 무렵 누군가가 사준 커피 한 잔으로 비로소 시작된 된 어른의 세계였다. 그날 너무나 뜨거워서 맛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오래토록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던, 그 커피 한 잔으로 열렸던 새로운 세계의 문.
긴 세월을 훌쩍 뛰어 해후한 커피는 견디고 버티기 위한 각성음료였다.
학교로 학원으로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몰려오는 피로를 물리치는 데에는 커피가 특효였다.
갈수록 그 효과를 맹신해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쓸 때면 버릇처럼 동원하던 농도 진한 커피는 흡사 사약(賜藥) 맛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어느 벗이 이토록 성실히 내 곁에 머물며 내 흐리멍텅한 정신을 이리도 말끔히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돌아보면 지친 내 곁에서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고 일깨워 준 가장 훌륭한 벗이 커피였다.
연구에 따르면 각 개인의 인성(人性)에 따라 커피가 미치는 영향이 다르단다. 이를테면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는 등의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반면 내성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대의 증상을 보인다던가. 대위법으로 잘 알려진 요한 세바스찬 바흐 역시 무척이나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너무도 커피를 사랑한 나머지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란 일 막의 코미디 가극을 작곡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커피를 즐기기로 고종도 빼놓을 수 없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유난히 커피를 즐기는 고종의 취향은 왕을 파멸시키기 위한 무리들의 이용수단이 되기도 했다.
김홍륙은 본디 미천한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정2품의 벼슬에 올랐다. 러시아 통역관으로 특채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다가 한성부 판윤에 제수된 것이다.
왕을 향해 자신은 어로불변(魚魯不辨)의 무식쟁이라며 몇 번이고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거짓 겸손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후 벼슬길에 오르자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리면서 인사권에 깊이 결탁하였다.
360개 군의 수령 중 바뀌지 않은 곳이 대여섯에 불과할 정도로 전횡하고 농간했다. 그것도 불과 넉 달 동안 벌인 일이었다. 그 결과 흑산도로 유배되자 반성은커녕 오히려 고종을 향해 원한을 품었다.
그의 머리를 스쳐간 건 왕이 사랑해 마지않던 커피였다.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의 우두머리를 포섭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도록 사주한 것이다.
한 노인은 고백했다. 자신에게 인생의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좀 더 많은 실수를 하고 싶다고. 좀 더 우둔해지고 가능한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도 않겠단다. 할 수만 있다면 춤추는 장소에도 자주 나가고 회전목마도 자주 타고 누군가의 핀잔을 들을지라도 되도록 데이지 꽃도 많이 꺾겠단다.
내게도 똑같은 기회가 온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하고 달콤하고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을 욕심껏 갖고 싶다. ‘술, 담배, 커피, 설탕…’ 매력적인 배우 키아누리브스가 초콜릿 장사로 나왔던가. 영화 ‘구름 속의 산책’에서 갖가지 모양의 초콜릿 앞에서 할아버지가 선택을 망설이며 읊던 금기 음식 목록이다. 우리가 선호해마지 않는 유혹의 맛들에 당당히 낀 커피 아닌가. 원고 마감 날, 마감 시간이 넘도록 글제조차 정해 놓지 않은 배짱 좋은(?) 나다. 이런 늑장이 내심 걱정이 되지만 우선 진하고 진한 내 특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심호흡을 하며 기다려 볼 일이다.
그러자면 어느덧 빼꼼히 열리는 글의 입구려니, 서성이는 내 등을 슬쩍 밀어주는 아, 한 잔 커피의 위대한 힘!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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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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