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45) 축구국구대표팀 감독 유임 결정은 자충수였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아집을 부리던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규)가 곤경에 처했다.
홍 감독은 10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2층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사퇴를 공식 발표했다.
그는 “이 같은 자리에 서게 돼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며 “지난 브라질월드컵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얘기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실망만 드려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1년 동안 대표팀을 이끌며 실수도 있었고 잘못도 있었다. 저 때문에 많은 오해가 생겼던 것 같다”며 “발전된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오늘로서 이 자리를 떠나겠다”고 전했다.
브라질월드컵 선수단 단장을 맡았던 허정무(59) 부회장과 황보관(49) 기술위원장도 이날 동반 사퇴했다.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월드컵 직후 홍 감독이 스스로 물러났다면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살릴 수 있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이날 자진사퇴는 사실상 ‘자진’이 아니다. 한때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홍 감독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사생활까지 언론에 공개되며 명예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허 부회장과 황 위원장도 홍 감독과 함께 등 떠밀리듯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축구협회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사상 첫 원정월드컵 8강을 목표로 내걸었던 한국은 2014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에서 1무2패로 탈락했다.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것은 1998프랑스월드컵(당시 1무2패) 이후 16년 만이다.
‘원팀·원스피릿·원골(One Team·One Spirit·One Goal)’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홍 감독은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2012런던올림픽 대표 위주로 팀을 꾸리며 소위 ‘의리 엔트리’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본선에서는 부진한 경기력을 드러내며 ‘전술 부재’, ‘체력 부족’ 등의 비판을 받았다.
월드컵에서 실패를 맛본 홍 감독은 월드컵이 끝난 뒤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축구협회가 이를 만류했다.
정몽규(52) 회장이 직접 나서 홍 감독을 설득했다. 결국 유임을 결정을 내렸지만 내세울 명분은 없었다.
당시 유임 기자회견에 나선 허 부회장은 “대표팀 수장이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해 홍 감독을 계속 신뢰하고 지지하기로 했다”고 유임 이유를 설명했다.
여론은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다. 과정도 결과도 낙제점이었던 대표팀을 향해 비판이 쏟아졌지만 축구협회는 그저 ‘묻고 가자’는 식으로 버텼다. 홍 감독에게 짐을 넘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모든 책임은 유임된 홍 감독에게 쏠렸다.
월드컵에서 함께 고배를 들었던 아시아 국가들이 감독 교체부터 시작해 대표팀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때 축구협회는 이리저리 눈치만 봤다.
실패를 받아들이고 반성과 개혁에 힘을 써야 할 때 여론과 언론의 동향 살피기에만 급급했다. 홍 감독에게 다시 지휘봉을 떠넘기며 다가올 아시안컵에서의 선전을 약속했다. 월드컵도 아닌 아시안컵 우승을 전면에 내세우며 의미 없는 ‘도박’을 걸었다.
소통이 막히면서 결국 사고가 터졌다. ‘토지 구입’·‘음주 뒤풀이’ 등 홍 감독과 관련된 사생활들이 온라인과 언론을 통해 낱낱이 공개됐다.
정도가 심해지자 홍 감독도 버티지 못했다. 유임 발표가 난지 불과 7일 만에 축구협회의 결정을 뒤집고 중도하차를 알렸다.
얻은 게 한 가지도 없다. 지키려던 홍 감독은 더 큰 상처만 받은 채 불명예 사퇴했고 축구협회의 주축인 허 부회장과 황보 위원장까지 함께 옷을 벗었다.
당분간 축구협회와 대표팀 운영에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후임 대표팀 감독 선임을 비롯해 한꺼번에 공백이 생긴 인사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월드컵 직후 순리에 맞게 인선작업을 했다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발 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 일처리를 하면 또다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홍 감독의 갑작스런 퇴임에 축구협회도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지금의 위기를 타개할 마땅한 대책은 없어 보인다.
정 회장은 “조만간 후임 감독을 선임하고 각 연령별 대표팀 운영 체계를 새롭게 마련하겠다”며 “축구협회는 지금의 시련을 거울삼아 더 큰 발전을 이뤄내겠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다. 국민들의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한다”고 자칫 공허하게 들릴 수 있는 계획을 밝혔다.
대표팀은 올해 세 차례 정도 A매치를 치르고 내년 1월에는 호주에서 열리는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 출전한다.
여론과 상식을 무시하고 홍 감독 유임을 강행했던 축구협회는 재도약을 준비해하고 있는 한국 축구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