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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작성 : 2013년 12월 10일(화) 18:07 가+가-
매년 12월 초순 무렵이면 내게 찾아드는 증상이다. 은근한 기대와 함께 감도는 가벼운 몸살기운. 이맘때 만나기로 한 좋은 사람, 마침내 그 약속일 앞날인 양 가슴 설레는 느낌의 연원은 김장이다. 내 집의 방문객들에게 몇 포기 씩 나눠주어도 좋을 정도로 넉넉하게 담아 다음 김장때까지 꼬박 1년을 먹는다. 그러니 뜻밖의 복병처럼 우리의 식탁을 긴장시키는 지루한 봄 가뭄이나 꼬박 석 달을 채우려는 듯 지지부지 늘어지는 여름장마의 여파로 혹여 배추가격이 폭등해도 나는 느긋할 수 있다.
집에서 기르는 배추는 이러니저러니 감히 때깔을 탓할 수 없다. 아기 손가락 크기의 가냘픈 모종들이 진초록 이파리를 펄럭이도록 씩씩하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또 고맙기 때문이다. 의도된 주인의 무관심과 절반은 제 힘으로 늦가을을 버틴 배추는 겨울 입구에 이르면 내 취향에 딱 맞았다. 굳이 날짜에 구애 받을 필요도 없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밭고랑에 뽑아놓으면 준비 끝. 그러나 올해는 마음도 몸도 무언가로 꽤나 분주한 한 해였다. 무성히 자란 잡초로 방치된 텃밭이 내 어지러운 심사처럼 볼썽사나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건 그렇고, 주변의 대다수가 그냥 사다 먹고 말겠다 선언하는 김장김치에 대한 서운함인가. 어느 이가 레시피 삼겠다고 동영상까지 찍어갔으니 이번 기회에 내 특유의 김장법, 그 요령을 소개해볼까.
무엇보다 양질의 재료가 우선이니 무엇보다 배추의 선택이 관건이다. 푸짐한 물과 비료 덕으로 풍성히 자란 우량종은 내겐 탈락이다. 고생하며 자란 티가 풀풀 풍기는 짧은 체형의 엉성한 배추가 제격이다. 제 옹고집으로 뭉쳐 답답한 사람처럼 속이 꽉 들어찬 것도 실격이다. 구성비가 반 반, 진초록 잎 절반에 그 반인 노란 잎은 슬렁슬렁할 것. 요행 까다로운 요건을 통과한 배추를 장터 난전에서 만났다. 반가움에 할머니를 따라 깊은 골짝 밭에까지 원정 구매에 나섰다. 실은 깔끔한 행색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겉잎을 모조리 따내는 헛수고의 위험을 예방키 위함이다. 햇살의 넉넉한 애무를 받은 검푸른 잎의 가치라니!!
이제 본격적인 김장담기의 수순이다. 맨 먼저 밭에서 뽑아온 배추를 조심스레 사흘을 방치한다. 졸지에 제 뿌리가 잘려나간 배추는 갈증으로 수분이 아쉽다. 하루, 하루 풀이 죽는다. 습기만 아쉬운가. 무엇인가 제 몸에 닿는 기척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배추의 상태가 된다. 바로 그때 소금 간을 한다. 소금도 오지항아리 속에서 몇 해를 묵혀 둔 것, 하니 간절하고 간절했던 것들이 서로 만나 반갑다는 맞인사의 어울림 소리가 들릴 정도랄까. 배추 가슴이 위를 향하도록 채곡하게 쌓아 소금 간을 마치면 이제 양념 준비다. 고추, 마늘, 생강, 멸치젓, 청각 등등의, 전라도 김치의 단골 양념 메뉴에 늙은 호박, 표고 말린 것, 찰조를 추가해 걸쭉하게 현미 찹쌀로 죽을 쑨다. 여기에 새우젓, 생새우, 불미나리, 대파까지 모두 섞어 쫀득쫀득 김치에 잘 엉기게끔 소를 준비해둔다. 절인 배추는 차곡차곡 쌓아 물을 빼두고 나도 하루쯤 뜨끈뜨끈한 방에서 몸을 다스린 후에야 김장이란 거사(巨事)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다. 백포기 넘는 김치라도 고무장갑은 절대 사절, 맨손을 고집한다. 초밥 명인들도 자신의 손끝에서 나오는 맛을 무시할 수 없다지 않던가. 밤새 후끈거리는 손, 허리도, 다리도 안 아픈 곳이 없을 만큼 욱신거려 신음이 날 정도지만 대 여섯 개 가득한 김장독의 포만감이 그를 너끈히 상쇄한다.
최근 우리의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제로 지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영문으로는 ‘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이니 ‘김치를 만들고 나누는 김장’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은 이웃 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며 연대감과 정체성을 높일 수 있다,’는 선정위원회의 평가다. 여러 세대에 걸쳐 가정에서 전승돼 왔고 마을 주민이 함께 담궈 형편이 어려운 집에도 나눠주는, 한국인 특유의 나눔과 공동체 문화를 상징하며 사회 구성원들 간 결속과 연대감 강화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점을 인정받았다 한다. 맞다. 김장거리를 잔뜩 쌓아두니 내게도 몇몇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하지만 바깥마당에서 강바람 맞아가며 해야 하는 궂은일도 주저되었지만 오고갈 거리도 결코 만만찮다. 오히려 번거롭고 일손만 더디었던 지난 해의 기억까지 겹쳐 결국 머리를 가로젓고 말았다. 김치야말로 한 해 농사, 섬세한 손길의 과정이니 무엇보다 차분함이 요구된다는 명분으로 고생을 자처한 꼴이다. 김장의 참맛이 어디 있겠는가. 최상의 천연 조미료인 화합과 소통, 떠들썩한 웃음이 첨가된 이 오묘한 맛의 어울림은 내가 놓쳐 서운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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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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