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꿈치 쳐들고 이마에 손 얹으며 저 먼 곳을 응시하려 애쓰는 아이. 그런 아이가 내 속내엔 여전히 자리했다. 색(色)은 그만큼 나를 목이 마르게 했다. 그런 내게 미술전시회 초대장은 항시 반갑다.
‘파랑(波浪), 차오르듯’이라는 제명을 단 윤세영의 미술전람회. 파랑(波浪)은 작은 물결과 큰 물결을 의미하니 물이나 달이 차오르는 과정을 다양한 파랑색과 여러 소재를 통해 작품화했다는 화가의 변(辯)이다.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는 달을 보며 인생의 참다운 이치를 깨달았다는 선인(先人)의 말이 있었던가. 따져들면 크고 작은 물결이 일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팜플렛 속 소개해 놓은 고향 강진의 친가 어르신의 삶이, 가슴 가득 물살 번지듯 다가오는 남도 여인네의 삶이 화폭 속 푸른 물감인양 잔잔하게 스며든다.
바다 근처에서 살았던 덕분에 파래자반을 따 말려 먼 산골 마을까지 식량과 바꾸러 다니기도 했다는 ‘강진 마량으로 시집 온 김막래 이야기’. 이는 분명 이번 전시회의 화두(畵頭)가 되었을 것이다. 푸른 실타래로 너울너울 풀어 쓴 파랑(波浪) 가득한 옛 여인네의 삶, 그 흔적을 꼼꼼히 살펴 읽는 동안 입 안 가득 번지던 한반도 남쪽의 감미로운 해조(海藻) 맛! 그를 떨치기도 힘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나와 동향(同鄕)인 화가의 작품에 대한 기대도 한 몫 했으리라. 그녀의 초대장은 집수리로 정신없이 바쁜 틈을 쪼개어 나서게 만들었다.
드디어 유스퀘어 갤러리로 향하는 길, 때마침 퇴근 시간이라 밀리는 차량행렬에 떠올려보는 프랑스의 화가 오딜롱 르동이다. 르동 역시 햇살 가득한 프랑스 남쪽 보르도 출신이다. 초기에는 지병과 종교적 문제, 무엇보다도 비사교적 성격으로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는 화가 르동. 그런 무명의 오딜롱 르동을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화가 반열에 오르게 하는데 일조한 것은 소설가 위스망스였다고 한다. 위스망스는 자신의 소설 속에 괴팍한 성격의 귀족노인을 등장시켰다. 소설의 주인공인 기벽(奇癖)의 노인이 액수를 따지지 않고 구매한 그림을 르동의 것으로 장치한 것이다. 위스망스의 전폭적 지지와 여러 벗의 격려에 힘입어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과 동명(同名)인 동판화집을 펴낼 만큼 유명세를 탔다던 르동.
윤세영 화가. 그녀는 왜 하필 파랑(波浪)과 파랑 물감, 그러니까 남쪽 바다의 끝없는 부대낌과 삶의 울혈 빛깔을 택해 작업을 하였을까. 고통 또한 성숙(成熟)으로 가는 여정. 그녀 또한 매 순간 진취(進就)의 희열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리라 짐작한다. 한 폭 한 폭의 작품이 완성되는 전 과정을 사진작가가 개화(開花)의 순간들을 빠짐없이 타임 랩 기법으로 촬영하듯 사진으로 낱낱이 펼쳐 놓은 시도가 신선하다. 화상(畵象)과 음률과의 어울림. 이 또한 관람객을 위한 따뜻한 배려의 장치다.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슬라이드 영상으로 펼쳐지는 파랑(波浪), 그 푸른 숲. 어느덧 검은 짙푸름으로 우거진 물감 수풀 속에서 끝없는 파랑(波浪)으로 일렁이는 윤세영이라는 화가의 무궁한 도약, 그 꿈을 오딜롱 르동의 위스망스가 되어 열렬히 응원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