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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가 마음에 스미는... .
김현임 프리랜서 작가.문화해설사
작성 : 2013년 11월 12일(화) 18:08 가+가-
엊저녁, 늦깎이 국문학도인 K의 손에 들린 현대시론 과제물첩이 눈에 확 들어왔다. 한 부 전해 드리고 싶었다는 말의 반가움에 곧바로 펼쳐 읽었다. 많고 많은 시인 중 박형준을 선택한 건 우연히 접한 시인의 인터뷰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다는 K. ‘일상생활에서 너와 나, 사람과 사물을 살피면서 혹시 아픈 데나 상한 데가 없나 배려하며 의도를 가지고 관찰하는 게 아니라 주변풍경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을 하인처럼 충실하게 받아 숙제하는 마음으로 시어를 건져 올린다’는 시인에게 끌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그가 경작한 시의 뜨락을 거닐어보고 싶었더란다.
‘황혼’, ‘백 년 항아리’, ‘진달래 길’, ‘나는 채소 먹으러 하늘나라 가지’, ‘달에 간 흔적이 있다’ 등등. 사과나무 꼭대기에 간신히 열린 작은 열매를 젊은 남녀 간의 사랑으로 형상화하여 현실 속 차디 찬 지하 셋방 맨 방바닥에서 꽃무늬 요를 펴고 나눈 서로의 아픔의 의미를 ‘사과나무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고 읊어 낸, 표제작이자 시집 제목이 된 시까지, 이 가을날 나는 시가 오래 만에 해후한 벗처럼 반가웠다.
실은 어제 하루 종일 장작을 잔뜩 들인 조도 낮은 황토방에서 일 년 내내 발췌해 둔 시 조각들을 정리했다. ‘황홀하다’는 표현이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에 적용되지 않을까. 시를 읽어가는 내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내 생은 이런 가을날들을 맞기 위해서 그동안의 신산함을 묵묵히 견뎌온 것이 아닐까도 싶어졌다. ‘삶은 말로 지어가는 집과 같다. 말은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을 만들어 나가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여태까지 내가 뿌려놓은 말의 씨앗들이 현재의 내 삶을 이루는 틀이 되었고 그 말의 열매들을 내가 하나씩 거두며 살아가고 있다’했다. 거칠 대로 거칠어진 마음의 이랑에 고운 시톨들을 천천히 뿌리 듯 한 편, 한 편 아껴가며 읽어가는 동안 살랑살랑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러다가 만난 글귀, 일도 사랑도 LTE급 속도로 치러내는 요즘에 낭만은 이제 사치라지만 ‘마시고, 사랑하고, 공부하자’ 권하며 낭만회복을 외치는 노평론가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했을까. 시밭의 갈피, 갈피를 헤집는 사이, 사이에 그윽한 맛의 한 잔 술이 간절했다. 맞다. 어느 날 문득 내 곁에 다가온 11월, 만추(晩秋)다. 퇴계 선생 말씀처럼 아늑한 산사의 등 하나(山寺一燈), ‘푸른 창 깊은 곳에 등불 하나 밝혀도’ 더 없이 좋은 절기 가을 아닌가. 세상의 모든 사업이 그 등불 아래에서 나왔다고 했으니 굳이 깊은 학문서 아니라도 이 가을, 한 권의 시집과 함께 뒹굴며 시에게 가만가만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게 하는 축복에 빠질 일이다.
어느 때보다 난로 같은 온기를 지닌 벗이 그리운 시절이다. 추사(秋史)는 절친한 친구인 황산(黃山) 김유근이 찾아 온 기꺼움을 ‘돈으로도 술로도 세월은 잡지 못 하네(難把酒錢歲月?)/석류꽃 눈에 가득 불꽃처럼 피는 때에(滿眼石榴開似火)/문 앞에는 삐걱삐걱 시인의 수레 도착했네(門前轢轢到詩車)’라고 읊었다. 어찌 사람에만 국한되랴. 만물이 모두 첫 추위에 오슬거리며 정 그리운 오누이처럼 말을 붙인다.
주변 풍경이 자신에게 들려 준 말을 아랫사람이 되어 받아 적었을 뿐이라던 박형준 시인. 그의 말처럼 모든 사물은 서로에게 위무를 청하고 위무를 건넨다. 다만 우리의 어수선한 귀가 알아듣지 못할 뿐. 특히 시는 메마른 마음에 촉촉이 스며들어 우리의 습기를 회복시켜준다. 누군가 시란 ‘인류의 모국어’라고 했다. 요람 속 어린 우리를 어루어 주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말이 시이니 세파에 깊게 패인 상처로 얼룩진 심상(心象)은 어느새 본연의 천진(天眞)으로 돌아간다. 다가올 봄을 위해 긴 휴식에 들어가는 절기, 시라는 고운 씨앗을 심전(心田)에 갈무리하기 좋은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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