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째 응어리 풀지 못한 5·18 유족
“엄마가 미안하다”… 시위 나가는 아들 더 만류 못해
“가정 파탄낸 죄 지은 전두환 죽어서도 묻히지 못해”
작성 : 2024년 05월 15일(수) 17:21 가+가-

“엄마가 미안하다. 도청에 갔을 때 기언치 데리고 나오지 못해서…”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사흘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비통하게 세상을 떠난 가족의 묘소 앞에서 선 이들이 가슴 속 맺힌 응어리를 조용히 토해내고 있었다.
항쟁 당시 16세로 계엄군 총탄에 숨을 거둔 고 안종필 열사의 어머니 이정님(88) 여사는 뙤약볕에도 아들의 묘소 앞에 주저 앉아 한참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 여사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찍힌 사진을 봤을 때 심정은 말로 다…말로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지. 그리운 아들이 한 번은 꿈에 나와 책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나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제는 더이상 꿈에도 나오지 않더라고…”라고 털어놨다.
항쟁 당시 시위를 나가는 아들을 더 만류하지 못한 미안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여사는 “종필이에게 엄마가 미안하다고만 했다. 도청에 나가 집에 돌아오라고 몇 번을 찾아갔는데 결국 잡지 못했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여사는 생애 유일한 바람으로 “종필이가 죽은 장소에 가보고 싶다”며 최후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의 조속한 복원을 바라며 손자들이 끄는 휠체어에 올랐다.
당시 광주상업고등학교(현재 광주동성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안 열사는 휴교령이 내려진 5월19일 다음날인 20일 오전 전화 한 통을 받은 뒤 집을 나섰다.
이 여사가 시위에 나서지 못하도록 숱하게 붙잡고 만류했지만 안 열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고 교복을 물에 담궈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안 열사는 교련복을 챙겨입고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에 재합류해 마지막 진압이 있었던 27일 오전 2시께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윤연숙(70)씨도 오빠 고 윤승봉 열사의 묘 앞 제단에 조촐한 안줏거리와 함께 소주를 올리며 비통함을 삼켰다.
윤 열사는 태어난 지 넉 달된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일가족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았고 생전 가장 역할을 했던 윤 열사를 졸지에 잃은 뒤 가세도 기울었다.
윤씨는 생전 술을 즐겨 마셨던 오빠를 기리며 매년 묘소에 주인 없는 술상을 차리고 있다. 잔에 따라놓은 소주를 묘소 주변에 붓던 윤씨는 “여기 묻혀 계신 열사들 가족 중 5·18 이후 화목했던 가정이 있었을까요. 단언컨데 한 가정도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여기 묻힌 열사들 한 명 한 명이 피워보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죽었다”면서 “죄 지은 전두환은 죽어서도 묻히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이 많은 가정을 파탄 내고 비극으로 몰아넣은 죄는 죽어서도 씻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윤 열사는 항쟁 당시 5월 20일 들끓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한 목소리를 보태기 위해 시민행렬에 참가한 뒤 계엄군에 체포당했다. 보름이 지나서야 광주교도소에 수감돼있다는 소식이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간곡한 청원 끝에 석방됐지만, 이미 모진 고문에 시달린 윤 열사는 이듬해 4월 병세가 악화되면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김재홍 열사의 묘 앞에 선 손위 누나 김재순(65)씨는 “44년 전 동생이 총격에 쓰러진 날이 5월 21일(음력 4월 8일). 오늘처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다”며 동생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공부도 곧잘 해 집안의 기대가 컸던 손아래 동생은 44년 전 모습 그대로 교복 차림의 흑백사진으로만 남았다.
김씨는 “총격에 크게 다친 동생이 왼쪽 다리를 절단할 때 부모께서도 충격이 크셨다. 그해 여름은 온가족이 끔찍한 고통과 절망에 살았다. 동생이 죽고 난 뒤에도 잊을만 하면 형사들이 집을 찾아와 감시했다. 원통하게 죽은 것도 억울한데 폭도나 간첩으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화가 났다. 피해자여도 피해자라고 할 수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 열사는 5·18 당시 숭일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지자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합류해 민주주의를 외쳤다.
온 세상이 부처님의 자비를 축원하는 날,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로 김 열사는 총상을 입었다. 시민에 의해 겨우 발견된 김 열사는 전남 나주 한 병원으로 옮겨져 왼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 남겨진 심각한 부상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이듬해인 1981년 3월 세상을 등졌다.
장세종 기자 nak019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