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21·한국체대·세계랭킹 54위)이 세계 남자 테니스의 차세대 스타덤을 예약했다. 다시 한 번 한국 테니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정현은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결승에서 세계랭킹 37위 안드레이 루블레프(20·러시아)를 3-1(3<5>-4 4-3<2> 4-2 4-2)로 제압, 우승했다.
정현이 ATP 투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 투어 대회 최고 성적은 올해 5월 독일 뮌헨 BMW 오픈 4강이다. 한국 선수가 ATP 투어 대회에서 우승을 따 낸 것은 2003년 1월 시드니 인터내셔널 이후 14년 10개월 만이다.
한국 테니스의 역사를 다시 써나가고 있는 정현은 테니스 집안의 막내다. 아버지 정석진씨는 선수 출신으로 삼일공고 테니스부 감독을 지냈고, 형 정홍(24·현대해상)도 테니스 선수다.
어린 시절 고도 근시와 난시로 고생한 정현은 넓고 초록색인 것을 많이 보는 것이 시력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테니스를 시작했다.ATP 투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 중 드물게 시력 교정을 위한 안경을 착용하는 정현에게 ATP 홈페이지는 “교수”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체격 조건과 운동 신경이 남달랐던 정현은 라켓을 잡은 지 얼마되지 않아 두각을 드러냈다. 2008년 오렌지볼 12세부와 에디 허 인터내셔널 12세부에서 우승했고,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 정상에 올랐다. 모두 한국 선수 최초다.
2013년 메이저대회인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에서 준우승, 희망으로 떠올랐다. 메이저대회 주니어 단식 준우승은 정현이 역대 4번째, 윔블던에서 준우승한 것은 정현이 처음이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 임용규와 조를 이뤄 복식에 나선 정현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테니스가 남자 복식 금메달을 딴 것은 1986년 서울올림픽 유진선·김봉수 이후 28년 만이다.
정현은 2015년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단식 금메달도 거머쥐었다.
꾸준히 챌린저 대회에 나서며 기량을 끌어올리던 정현은 지난해 컨디션 난조와 복부 근육 부상으로 고전했다.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고배를 마셨고,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인 윔블던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권이 돌아왔지만, 컨디션 난조와 부상으로 인해 포기했다.
더 멀리 뛰기 위한 웅크림이었다. 지난 시즌을 아쉬움 속에 보낸 정현은 올해 1월 호주오픈에서 개인 통산 두 번째로 메이저대회 단식 본선 승리를 일구며 반등을 예고했다. 4월에는 ATP 투어 바르셀로나 오픈에서 당시 세계랭킹 31위 필립 콜슈라이버, 21위 알렉산더 즈베레프(이상 독일)를 차례로 꺾고 8강에 올라 라파엘 나달(스페인)과 ‘꿈의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1주 뒤 ATP 투어 BMW 오픈에서 2회전에 당시 세계랭킹 16위 가엘 몽피스(프랑스)를 꺾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 개인 통산 처음으로 투어 대회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정현은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인 프랑스오픈에서 3회전까지 진출했다. 정현이 메이저대회 3회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고, 한국 선수의 메이저대회 3회전 진출은 2007년 9월 US오픈에서 16강까지 오른 이형택(41) 이후 9년 9개월 만이었다.당시 3회전에서 니시코리 게이(일본)과 한일전을 벌인 정현은 대결을 5세트까지 몰고가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랑스오픈 3회전 진출 이후 정현은 왼 발목 부상 탓에 시즌을 잠시 쉬어야 했다.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 윔블던에도 불참했다.
정현은 7월 복귀 이후에도 좀처럼 제 컨디션을 찾지 못했지만, 지난달 초 상하이 롤렉스 마스터스 1회전에서 당시 세계랭킹 13위 로베르토 바우티스타 아굿을 물리치며 부활을 예고했다.
정현은 21세 이하 선수들 중 세계랭킹 상위 8명이 참가하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한국 테니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세계 남자 테니스의 차세대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03년 1월 이형택이 시드니 인터내셔널에서 우승한 이후 투어 대회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하던 한국 테니스로 날아든 낭보다.
정현은 그러나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을 뛰어넘지는 아직 못했다. 한국 선수 최고 세계랭킹은 여전히 이형택이 2007년 8월 기록한 36위다.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 또한 이형택의 2007년 US오픈 16강이다.
정현의 개인 최고 세계랭킹은 올해 9월 44위,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은 올해 프랑스오픈 3회전 진출이다. 하지만 정현은 이번 대회 우승으로 기대를 한껏 키웠다. ‘전설’을 뛰어넘는 것도 시간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