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가 삼성그룹 및 국민연금 관련 로비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삼성은 구속기소된 최순실(60)씨 일가와 미르·K스포츠재단에 드러난 것만 300억원 규모의 자금을 건넨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와 삼성을 둘러싼 의혹 가운데 가장 부각되는 것은 지난해 이뤄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관한 청탁 여부다.
두 회사의 합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필수적인 지분 조정 절차로 여겨진다. ‘삼성물산→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고리를 해소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여기에 국민의 노후자금을 위탁 운영하는 기관인 국민연금공단까지 동원됐다는 의혹을 접한 시민들은 허탈해 하는 모습이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사는 이모(28·여)씨는 “국민들 혈세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기업의 뒤를 봐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다”며 “이러려고 국민연금 가입시키나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경기 수원에 사는 양모(32)씨는 “나 같은 직장인은 내고 싶지 않아도 내야 되는 세금 같은 돈으로 저런 일을 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며 “자기 돈이라면 저렇게 했겠나. 사기업 경영권을 방어해주라고 국민연금을 낸 것이 아니다”라고 개탄했다.
검찰은 삼성이 피의자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으로 지목된 최씨 등에게 보낸 이 같은 자금이 지난해 계열사 합병에 대한 대가성이었는지 여부를 수사 중이다.
삼성은 최씨 등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창구로 모금한 재단 기금 204억원, 최씨와 그의 딸 정유라(20)씨에게 직간접적인 경로로 70억원 넘는 자금을 건넨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23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사무실과 삼성 미래전략실, 홍씨의 사무실 등을 동시에 압수수색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문형표(60) 국민연금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 의결하도록 강요했다는 의혹으로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는 검찰이 삼성과 정부, 국민연금 사이의 모종의 연결 고리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고 수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민연금은 표대결 양상을 보이던 당시 합병 주주총회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국민연금은 이 같은 상황에서 삼성물산 주총에서 이례적인 절차를 거쳐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합병 전후인 지난 2월과 7월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을 만났고 최씨 등에게 자금을 전했다. 국민연금의 이례적인 찬성 의결은 주총 2주 전 기금운용본부장을 맡은 홍완선(61)씨가 이 부회장을 만난 뒤 이뤄졌다.
삼성 측은 최씨 등에게 내준 자금의 성격을 두고 “돈은 말 구입에 쓰였고 말은 삼성 소유”라며 “나중에 말을 매각해 나온 비용도 다시 삼성전자 쪽으로 입금 됐다”고 대가성이 아니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하지만 계열사 합병 과정의 각종 정황, 정관계 로비를 통해서라도 국민연금을 설득했어야 할 당시 상황 등을 감안하면 삼성 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 세간의 지적이다.
삼성은 지난해 7월17일 핵심 계열사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했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4월말부터 준비한 합병안을 5월26일 발표하고 약 50여일 만에 이를 가결했다.
문제는 1대 0.35로 산정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이었다. 주주들 사이에서 삼성물산이 총수 일가의 경영승계에 유리하도록 합병 가액을 과도하게 저평가했다는 불만이 제기되면서 표대결 국면이 형성됐다.
지분 7.12%를 보유한 3대 주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자사에 과도하게 불리한 비율임에도 합병안을 가결하려는 삼성물산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다수의 소액 주주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고, 업계에서도 규모가 큰 삼성물산이 아닌 제일모직이 흡수하는 형태의 합병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