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도토리 키 재기
작성 : 2014년 09월 23일(화) 16:23 가+가-
잠자리에 누우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영모정 둔덕에서 누군가 봉지 가득 도토리를 주워 오자 너나없이 시샘하듯 그 대열에 합세했다.
명족 나주 임씨 집성촌인 영산강변 회진마을, 유서 깊은 정자 영모정을 휘돌아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우리 동네 다섯 가구가 돌연 도토리 줍기 열풍에 휩싸인 것이다. 일어나 눈곱도 떼지 않고 나와서였다는 건 핑계다. 일찌감치 그동안 내 단골 구역이었던 곳을 침범(?)해 유유히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윗집 아재를 외면한 까닭은 민망함 반에 서운함 반이 겹친 거부감이었으리라.
이러다가 행여 정다운 이웃 간에 금이 가지 않을까. 날이 갈수록 과열로 치닫는 게 은근히 염려될 지경이라고나 할까.
너도 나도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경쟁이라도 하듯 이슬기 가시지 않은 신 새벽에 일어나 등성을 헤맨다. 그것도 모자라 따가운 가을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낮에도 틈만 나면 슬슬 풀숲을 기며 더듬는다. 보물찾기가 이리 즐거우랴. 마주치는 이들 모두 바닷가를 헤매며 조개를 줍는 유년의 아이처럼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땅바닥에 배를 붙이고 다소곳 얌전히도 잠든 도토리. 아무리 입 다물라고 당부를 해도 도톰한 도토리 열매 한 알에 탄성을 터트리는 언니다.
아무튼 늦잠으로 소문 난 게으름뱅이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했으니 풀숲 언덕길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자석들 멕일라고… ’-이는 시앙동댁 아짐.
‘항암 치료 받는 지아비의 입맛 회복용으로’-이는 운강선생 사모님의 변(辯).
우리라고 핑계가 없을까. 정기 건강검진에서 우리 자매함께 고 콜레스테롤 지적을 받지 않았던가. 웃고 떠들며 숲을 헤매는 그 쏠쏠한 운동효과를 내세운다. 우리가 노리는 건 자연 다이어트, 그 뿐이 아니다. 껍질만 덩그마니 남은 도토리에 “이 양반은 모자만 벗어 두시고 어딜 가셨나?” 풀숲까지 더듬는 제 염체 없는 행위를 변명하듯 “아이구! 다람쥐님. 너무도 죄송합니다.” 서툰 동시가 연발이요, 동화 속 대사도 심심찮게 튀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영모정을 제 집 삼던 다람쥐 영감님이 웬 일로 자취조차 보이지 않는다. 도토리 수확에 바쁜 가을엔 마누라를 있는 대로 얻었다가 추위 닥친 계절엔 모조리 쫓아내고 눈 먼 색시 하나만 데리고 산다는 고약한 소문의 진원지인 다람쥐 영감 아닌가.
그렇다면 지난 해 데리고 살던 눈 먼 각시 굶어 죽고 난 후 재취댁 선자리에 분주하신 것일까.
이 가을 나 역시도 바쁘다. 무엇보다 벼룩투성이 털빛 꾀죄죄한 개들의 목욕을 더 추워지기 전에 시켜 줘야한다. 목욕·하니 마당에 수북이 떨어진 감들은 어서 말끔히 목욕 시켜 식초 항아리로 보내 달라 보챈다.
누른빛 도는 깻잎도 늦기 전에 장아찌로 변신시켜 달라 조르고. 사방천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될 지 부지깽이도 덩달아 뛸 정도로 바쁘다는 이 가을, 채 땅힘 받지 못한 어린배추마저 목마르다 아우성이다. 이 모두를 나 몰라라 외면하며 갈빛 열매의 유혹 넘실대는 상수리나무 그늘로만 내빼는 중이다.
봄이면 현기증 나게 고운 꽃들과 지천에 돋아난 나물의 봄맛이 사로잡고, 여름이면 초록 무성한 녹음, 그 하나만으로도 넘쳤지만 시골생활의 즐거움은 모름지기 이 가을에 다 있다는 듯 설친다. 말 수 없는 우리 언니가 거드는 가을 예찬 한 마디다. ‘가을엔 병원이 문을 닫는단다. 도처에 붉은 감을 비롯한 건강식이 지천이기에…’ 아닌 게 아니라 짜글거린 햇살에 화드득 타는 배롱나무만으로도 눈은 풍요롭기 그지없고 쫙 벌어진 무화과에 야물고 탱글한 머루포도도 한 입, 새가 쪼는 바람에 가지에서 이탈했다고 하나 당도(糖度)의 수치만은 높을 게 분명한 홍시 등등에 입은 호사를 누린다.
막걸리 한 사발에 참기름 두른 쌉싸래한 도토리묵이 어우러질 눈 내리시는 날!! 도토리를 주우며 품는 그 낭만적인 기대라니! 그러고 보니 하는 수준이 딱 도토리 키 재기.
고만고만한 사연에, 고만고만한 욕심에, 그리고 고만고만한 고민을 안고 사는 우리 동말 사람들과 토박이 다람쥐 영감까지 가세한 한 톨 양보 없는 도토리 줍기 열풍은 한동안, 아니 상수리나무가 벌거숭이가 되는 만추(晩秋)까지 이어질 기세다.

김 현 임 작가·문화해설사
편집팀 기사 더보기

tdh1234@naver.com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시군별뉴스

오피니언

기사 목록

대한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