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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마티스
작성 : 2014년 09월 02일(화) 17:27 가+가-
노심초사 매달렸던 꽃의 개화처럼 반가운 게 있으랴! 그 찰나의 순간이면 온 천지만물도 잠깐 숨을 멎는다고 했다.
한 생의 탄생이 그리도 기껍고 엄숙하다면 그 시듦의 애석함이야 더 말해 무엇 할까. 고작 일주일 남짓이나 되었을까. 송이 째 툭 떨어지는 클레마티스에 속신음이 터진다.
일곱 날 쯤 피어나 시드는 꽃 한 송이에 이렇듯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까닭이리라. ‘내일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자못 심각한 제명의, 내가 속한 동인지의 올해의 공동제 수필에 골몰하는 요즘이다.
풀지 못한 과제물에 참고서를 뒤적이듯 며칠째 ‘마지막 행적’이라는 책을 붙들고 있다. 살아가는 데도 방식이 있듯이 죽는 데에도 방식이 있다고 했다.
나폴레옹, 아인슈타인 같은 뛰어난 인물들을 비롯해 마호메트, 부처, 예수 같은 성인들의 마지막을 다루었다.
성인들의 삶이 한 치 실수 없는 모범답안이라면 이들은 지나치게 유쾌한 재주꾼들이다. 그래서 하늘에서도 욕심을 낸 인재들이었던가.
모차르트, 바이런, 셀리 등등, 그들이 서른 해 남짓 머문 세상에다 남긴 흔적은 찬란하다.
용기 있게 살다가 영원한 명성을 남기고 죽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라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갈처럼 요절(夭折)한 천재들의 궤적은 부러움까지 인다.
한 때 유행처럼 번지던 ‘미리 유언 써놓기’였다. 애면글면 홀로 키운 세 딸들에게 당부하길 ‘한 그루 나무를 택해 그를 어머니 삼아 의지하며 살아가라’던 여류 소설가. 햇살의 기세는 꺾이고 제법 유순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한참 문화(文花)를 꽃 피울 만 할 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문학가들이 떠오른다. 소설가 이균영 교수가 그렇고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이윤기 선생이다.
소진이라는 이름이 하필 생의 기력이 다 했다는 소진(消盡)과 동음이어서 일까. 꽃으로 치면 이제 막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에 생을 마감한 소설가 김소진 선생의 죽음도 내겐 채 녹지 않은 입 속의 사탕을 졸지에 빼앗긴 아이의 심정을 느끼게 했다.
보라색 클레마티스의 낙화에 문득 스쳐가는 ‘마지막’이라는 단어. 어찌 한 마디 남길 말이 없으랴. 외마디 비명이라도, 단말마의 신음이라도 토하는, 제 생의 종말을 고하는 사슴과 백조의 울음 닮은 미리 쓰는 유서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제 그만 발걸음을 멈추라는 최종 이정표 앞에서 내 삶의 굽이굽이를 돌이켜 본다. 인생이란 잔치마당에서 제 신명 다한 북두드림의 후련함은 아니지만 큰 후회도 없다. ‘마지막은 언젠가는 온다.
그것이 언제인지가 무슨 문제인가?’, 이는 아인슈타인, ‘평화 속으로 물러나고 싶어’는 마리 퀴리의 절명사(絶命詞)다.
이제 코미디는 끝났으니 친구들이여 박수를 치라던 베토벤처럼 생이란 무대를 내려서며 ‘이게 끝이라고? 별 것도 아니구만’하며 투덜댔던 톨스토이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남겨야 하나? 아직은 생의 배터리가 남은 50대 후반의 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 내일이라 해도 무관할 것 같다.
유난히 적극적이셨던 어머니의 유전자 자투리가 내게 남았던가. 살아있는 동안은 바지런히 움직여야한다는 평소의 신념인지라 삶에 대한 관심이야 여전하지만 그 어떤 미련도 욕망도 사그라졌다. 그저 고즈넉한 늦가을 햇살처럼 편안하다.
나라는 여자가 어질러 놓은 생의 길목을 말끔히 소제할 힘과 하루라는 시간이 남아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나야말로 제 뿌리내린 마당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클레마티스! 몇 몇 다정한 얼굴들이 오버랩 되며 그들에게 건네는 작별의 말이다.
“행복했어. 변함없이 지지하고 사랑해, 어딘지 명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모두가 가 있는데 설마 두려울 리야. 어쨌든 먼저 가 있을게. 참!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얘들아. 어미의 모든 허물을 없애듯 내 허접한 육신은 거두어 태워 초록 무성한 나무 밑에 뿌려줘. 안녕!”

김 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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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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