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호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서의 자기 의지에 따라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삶속에서 마주 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입장에 처하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도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러면 자신의 고통을 이해받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보려고 하면서 아프니까 인생이라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왜’라는 외마디를 질러대곤 한다. 그런데 ‘왜’라고 할 때 “왜 하필이면 나야?”처럼 불만을 토로하기 위한 ‘왜’와 “왜 이런 일이!”처럼 벌어진 상황인식을 위한 ‘왜’는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의 ‘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밀어내려는 원망의 태도로 오직 저항하고 싶을 뿐 궁금해 하는 문제의식은 없다. 후자의 ‘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 진지하게 숙고하려는 변신의 태도로 단지 문제의 원인을 밝혀 궁금해 하는 것을 풀려고 할 뿐이다. 전자는 ‘저항의 왜’라면 후자는 ‘수용의 왜’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잦은 회식으로 자주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왜 당신은 날이면 날마다 술에 만취되어 오밤중에만 집에 들어오는 거요!”라고 소리칠 때는 남편이 밤늦게 귀가하는 이유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남편이 술 취해 밤늦게 귀가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 아내에게 “왜 당신은 만날 잔소리야?”라고 되받아치면 남편은 아내가 잔소리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고, 아내가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고통이 주어졌다면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할 게 아니라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주어졌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근원을 깨닫고 풀어내야 한다. 자식들이 공부는 안하고 게임에만 열중하고 있다면 왜 공부는 않느냐고 야단만 칠게 아니라 왜 자식들이 게임에만 집중하는지를 진정으로 궁금해 하고 게임에 열중하는 열정을 새로운 바람직한 일에 쏟도록 지도해야 한다. 우리는 대체로 불편한 상황을 맞이하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정을 쏟아낼 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는 요인에는 궁금해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근원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에는 거의 무신경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이 주어지면 왜 그런 시련이 자신에게 닥치는지를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의 왜’를 남발한다면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마음속은 속대로 더 상하고 정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려는 ‘수용의 왜’는 일단 고통의 상황을 인정하고 주어진 정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해결해야할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자신의 욕구와 선입관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해결책을 강구하게 된다. ‘수용의 왜’란 태도로 진솔하게 자문하게 되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주어진 상황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순수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온전한 이해를 통한 지혜로운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낼 수가 있다. 설령 당장 해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수용의 왜’는 더 이상의 악순환을 예방함으로써 자신의 고통도 더 늘어나지 않고 상대와의 갈등과 충돌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수용의 왜’가 무르익으면 알찬 결실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다. 붓다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불필요하게 저항하여 고통을 증폭시키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붓다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했다. 고통스럽고 아프니까 인생이라지만 ‘수용의 왜’를 항상 간직한 삶속에서는 밖에서 맞은 첫 번째 화살에 이어 스스로 자신에게 쏘는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고통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상황들을 회피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수용의 왜’를 통해 받아들이고 순응하려고 할 때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고, 지혜롭게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성숙한 자신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왜 힘겨운 상황이 주어졌는지를 진지하게 자문하는 여유로움 속에서 성공한 행복을 건져 올리는 인생의 진미를 맛보며 살아보자. (대한일보 2014.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