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로 신흥국의 금융불안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페소화 가치는 지난 23일 하루만에 11.7%나 폭락한 데 이어, 주말인 24일에도 1.5% 속락해 달러당 8페소에 마감됐다. 디폴트 위기를 겪은 2002년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이다. 통화가치가 속수무책으로 떨어지자 중앙은행은 환율방어를 사실상 포기했다.
터키 리라화도 총리 가족의 비리 스캔들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열흘 연속 하락해 달러 당 2.34리라로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신흥국의 금융불안 소식에 세계 주식시장은 일제히 급락세로 돌아섰다. 한국도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급락하는 등 영향을 받기시작했다.
마치 미국의 연쇄 금리인상에 따른 국제자본 이탈로 촉발된 1995년 초 멕시코 페소화 위기가 재현된 듯한 분위기다.
신흥국의 금융충격은 내부 정정불안과 외환사정 악화가 빚은 합작품이다. 국가부도 위기로 치닫는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액은 지난주 294억달러에 불과했다. 원자재·곡물 가격 하락에 따른 충격으로 작년 한 해에만 30% 줄었다고 한다. 외부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출구전략 여파로 신흥시장에 투자된 달러화가 미국으로 되흘러가면서 외환 사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달러역류 현상이 튼튼한 외환 방어망을 구축하지 못한 신흥국을 1차 제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중국의 경기 둔화는 외환 불길을 부채질하는 기름 같은 존재다.
국제 금융가에는 벌써 ‘불안한 5개국’, ‘벼랑 끝 8개국’이라는 이름의 살생부가 나돈다.
신흥국별로도 사정은 제각각이다. 브라질 남아공은 중국 제조업 부진으로 원자재값 하락 가능성에 따른 충격을 받고 있다. 터키와 태국은 정치위기로 혼란을 겪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취약한 제조업 경쟁력으로 어려움이 커졌다. 이들 신흥국에는 대부분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 악화, 외환보유액 부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이번 양적 완화 축소에 취약한 것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지목된 남아공 터키 브라질 인도 인도네시아 헝가리 칠레 폴란드 등 8개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직은 수출이 견고하고 경상수지가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외환보유액은 3500억달러에 육박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 중이다. 중국, UAE, 말레이시아, 일본 등과는 1245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약을 체결해 외환 안전망을 구축해놓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국제금융 시장에 적신호가 켜진 만큼 국내에 유입된 증시자금이 대거 빠져나갈 여지가 있다. ‘ATM(현금자동지급기) 체질’을 벗지 못한 우리 금융시장은 그간 해외 충격이 있을 때마다 크게 요동쳤다.
지나치게 높은 중국 수출 비중도 부담이다.
우리나라는 전체 수출 중 약 26%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아세안에도 약 15%, 중남미에는 6.5%를 의존하고 있다. 신흥국 불안이 확산되면 수출은 물론이고 내수와 투자까지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이 출구전략 방아쇠를 당긴 것을 계기로 고개를 든 외환사태의 후폭풍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위기대응 체제를 시나리오별로 촘촘히 손질해야 한다. 정부도 긴급 경제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열어 경제·금융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했다. 겨우 되살아나기 시작한 경기회복의 불씨가 해외 태풍으로 꺼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