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陽 전 종 채 / 시인. 나산중.고 교감
우리나라는 1962년 해외이주 통계 작성을 시작해 1976년 이민자수 4만 6천명으로 최대치를 이루고, 2012년 538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다. 그 이면에는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좋아졌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도 남북갈등, 남남갈등, 동서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국론은 분열되고 있다. 심적으로는 이민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여기 국론을 통일하고 한 마음으로 묶은 위대한 성자가 있다.
롤리흘라흘라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는 자, 말썽꾸러기)는 그의 원래 이름이었다. 그의 사진은 항상 환하게 웃고 있다. 마음씨 좋은 흑인 할아버지 같다. 그는 1918년 태어나서 2013년 타계했으니 95세의 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은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정책에 맞서 인권투쟁을 한 것이다. 흑인은 교통수단과 교육시설, 주거시설 등 공공수단에서 차별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백인과는 접촉도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 그는 간디처럼 비폭력운동을 전개했지만,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그는 27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20년은 로벤이라는 섬에 있는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채석장 같은 곳에서 온갖 학대와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그러나 1993년 출감하였고, 단독 백인정부와 흑인의 독립 국가를 꿈꾸는 극단적인 정치세력들의 온갖 비난을 받으며 중재에 중재를 거듭해 마침내 통일된 남아프리카를 지켜 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350년간 지속된 흑백분리정책도 끝내고 1994년 자유총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되었다.
27년을 감옥 생활 하였지만 그에겐 적이 없었다. 그가 출감하고 1994년 흑인 정권을 출범시키자 마지막 백인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는 스스로 부통령으로 내려앉아 그를 도왔고 훗날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자가 되었던 것은 그의 포용력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끌어안았다. 그가 보인 관용의 정신은 독재에 대한 투쟁 못지않게 온 인류에게 감동을 주었다. 당시 럭비는 백인만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1995년 그가 초록유니폼을 입고 럭비 월드컵 경기장 결승전에 등장하였고, 남아공화국의 흑백 선수들은 결승전에서 뉴질랜드를 이겨 감동을 더했다. 후에 이 일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우리가 꿈꾸는 기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로빈 교도소에 있을 때 딸이 면회를 왔다. 면회와 편지는 6개월에 한 번 허용되었다. 그가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밖에서는 그의 가족들이 온갖 핍박을 받았다. 딸은 결혼을 하였고, 손주 딸을 낳았으니 이름을 지어달라고 편지로 부탁하였었다. 그는 종이에 “ 어워즈 (희망)”라고 썼다. 딸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교도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절망하였는데 오히려 교도서 안에서 희망을 꿈꾸는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장례식은 세계 91개국의 현직 국가 원수와 10개국의 전직 국가 원수가 함께 했다. 단 3분 동안 참배 하기위해 몇 시간의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긴 행렬을 볼 때 그는 인류의 큰 스승이었음에 틀림없다. “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 싸웠고 또한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반대해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이상을 위해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그의 이 말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서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론이 그만큼 녹녹치 않게 얽혀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