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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문민용 논설위원
작성 : 2020년 10월 21일(수) 16:45 가+가-
사전에 긍휼은 <가엾게 여겨 돌보아 줌>이라고 되어 있다.
긍(矜) 은 불쌍히 여기다, 아끼다, 공경한다는 뜻으로
긍지를 가지다 할 때의 긍자와 같다. 휼(恤) 은 굶주리는 백성을 먹이다, 사랑한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히 여겨 보살핀다’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뉴욕에는 또 하나 라과디아 공항이 있다. 라과디아라는 이름은 뉴욕 시민이 아주 사랑했던 유명한 시장님의 이름이다.
라과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유명한 명판사였다.
추운 겨울날 라과디아 판사가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노인은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가 고파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었다. 판결 전에 라과디아 판사가 물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과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판사님, 저에게 한 번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장을 굽어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히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20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이 10불을 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불이 더 필요한데 이 법정에서 방청하시는 여러분과 우리 사회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고 도둑질하도록 버려둔 데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이 노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하시죠”.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재판관의 명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기부하였는데 57달러 50센트였다. 노인을 구하고 남은 47달러 50센트는 노인에게 주었다. 그 후 뉴욕 시민들은 라과디아 판사를 긍휼히 많은 판사라고 불렀고 후일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
베토벤은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가난할 때 그의 동생은 멍청한 사람이었지만 토지 투기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것을 알고 형이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지금 생활이 어려우니 좀 도와주게’ ‘형님, 가난한 것은 전적으로 형님 책임이고 형님의 몫입니다.’라고 회답이 왔다.
형은 섭섭해서 ‘네 재물도 필요 없고 네 설교도 필요 없다’라고 답했다.
여러분은 가난한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만 있고 부정한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긍휼히 없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어쩌면 내 책임이다. 이런 마음이 긍휼이다.
차머스는 그의 책 “정오의 강풍”에서 유명한 건축 기사 피어홈의 긍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어홈은 세계 곳곳에 많은 다리와 터널들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뒤에 질병과 실패로 인해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였다. 그 이웃에 몰인정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험하므로 피어홈은 자꾸 경고 했지만 번번이 모욕만 당했다. 그러던 중 그 개가 하필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이고 말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개의 주인을 비난하고 파종기가 되었어도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다.
노인이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냉소했다. 어느 날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는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이 보게 되었다. 그는 광에 가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꺼냈다. 그리고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권고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땅으로 남겨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새가 모이를 먹고 돌아와서 몸을 비비 꼬면서 그것을 토해내서 새끼에게 먹이는 것을 본다.
큰 새끼는 아예 주둥이를 어미의 목구멍 속에 집어넣고 꺼내 먹는다. 이렇게 해서 새끼를 키우는 어미 새의 사랑을 ‘긍휼’이라고 해석한다.
여인이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창조적 사랑이다. 여인의 자궁이 생명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절대적으로 주도적이어서 생명에 필요한 체온과 영양과 그 사랑까지도 공급한다. 그렇게 공급해 줌으로 그 생명이 존재한다. 신비로운 것은 자궁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아기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오래오래 기다려서 아주 작지만 하나의 갖추어진 생명체가 되어 나온다.
눈을 크게 뜨고 우주를 바라보라.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이 생명체를 품고 있는 여인의 자궁 같다.
즉 창조주의 자궁 속에서 창조주의 품속에서 우리가 자라나고 있다. 생명을 받아서 생명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 이 우주 속에 다 갖추어져 있음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그 큰 긍휼 속에서 우리가 무럭무럭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놀라운 생명력과 신비로운 사랑이 크게 작용한다.
라과디아 판사가 공의와 긍휼을 동시에 충족시켰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벌을 부과하셨지만, 그 형벌을 친히 담당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긍휼이라는 엄청난 사랑과 보호 속에 살아왔음을 새삼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큰 긍휼히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넘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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