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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층 영양부족 대안 ‘바우처’ 도입하자는데…예산당국만 ‘난색’
농식품부 내년 바우처 시범 60억 요구…정부 예산안 누락
취약층 식생활 지원에 1.9조 투입했지만 영양부족 여전
美 ‘푸드 스탬프’로 영양 불균형 해소…국가 경제도 도움
농민 단체 “국산 농산물 가격 안정·수급 조절 도움” 주장
기재부, 재정 소요 들어 난색…”예산 기준 바꿔야” 지적도
작성 : 2019년 12월 01일(일) 15:55 가+가-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에서 11번째로 잘 사는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균형 잡힌 식생활을 하지 못해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취약 계층이 여전히 존재한다.
정부는 영양부족이 우려되는 저소득층이 신선 농식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바우처’(voucher)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예산 심의 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사업을 기획한 농림축산식품부와 국회, 농업계 등에선 사업의 타당성에 힘을 싣고 있지만, 예산 편성권을 쥔 기획재정부에선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농식품부 내년 바우처 사업 추진에 60억 요구
1일 국회와 농식품부 등에 따르면 농식품부는 내년 중 ‘농식품 바우처 사업’을 시범 추진키로 계획하고 60억원 규모의 예산을 지난 5월 기획재정부에 요구했지만, 국회에 제출된 최종 정부안에선 탈락했다.
복지 사업 성격이 강한 만큼 한 번 도입되면 소요되는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 있다는 예산 당국의 판단이 반영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본 사업에 포함되면 몇 천억원짜리 사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사업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증액 심사에 재차 올라 있는 상태다. 농림축산해양수산식품위원회 소속 위원들은 이 사업의 도입 필요성에 줄줄이 힘을 보태고 나섰다.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먹거리가 넘쳐나도 소득의 불평등이 식생활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어 취약 계층의 영양 섭취 개선을 위한 농식품 바우처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높다”고 했다. 같은 당 김정호 의원 역시 “농식품 바우처가 실시되면 국내 농산물 수요가 확대돼 농민들의 시름을 덜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취약층 식생활 지원 1.9조 투입했지만 영양부족 심각
농식품부에 따르면 취약 계층의 식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연간 총 1조9000억원 규모의 예산이 투입되고 있지만, 이들의 영양소 섭취율은 권장 섭취량의 50~80%대에 머물고 있다.
소득이 중위소득의 30% 미만인 취약 계층의 절반가량은 칼슘, 비타민A, 리보플라빈, 나이아신, 비타민C 등 영양소가 크게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일 국회에서 열린 관련 토론회에서 연미영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박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취약 계층에서 영양 섭취 부족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노인(32.6%), 성인(35.6%), 아동·청소년(31.7%) 할 것 없이 전국 평균(8.5%)의 4배에 달했다.
농촌경제연구원(KREI)이 취약 계층과 사업 담당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취약 계층 중 40.3%가 현행 식품 지원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새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19.3%였다. 즉, 취약 계층 셋 중 둘은 현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필요한 정부 지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엔 21.8%가 식품 및 식사 지원을 꼽았다. 의료 지원(17.6%), 자녀 양육·보육 지원(14.6%), 주거 지원(13.3%) 등에 비해 높은 수치다.
◇美 ‘푸드 스탬프’ 같은 취약층 식품비 구입 전용 카드 도입
이에 농식품부가 구상한 정책이 바우처다. 6개월간 채소, 과일, 우유 등 현물을 구입할 수 있는 전용 카드를 가구당 4~8만원 수준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사업 대상은 식품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중위소득 50% 이하 취약 계층으로 한정했다. 부정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전자 바우처(카드) 방식을 도입하고 정해진 품목 외에는 구입할 수 없도록 제한한다. 바우처는 하나로마트나 로컬 푸드 직매장 등에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2017년 이 사업을 설계한 농식품부는 같은해 9월부터 2018년 2월까지 자체 연구 용역을 거쳐 사업의 타당성을 검증했다. 기재부로부터 국비 5억원을 지원받은 농식품부는 지난해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강원 춘천시와 전북 완주시에서 실증 연구도 시행했다.
연구 결과 취약 계층에 3만원 짜리 바우처를 지원하면 식품비 지출액을 3만4000원까지 늘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일(+4.9%포인트(p))과 채소(+7.1%p), 곡물(+9.7%p) 등의 지출액 비율이 모두 오른 반면 가공 식품 지출 비율은 55%에서 38%로 하락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실증 연구를 통해 미국의 ‘푸드 스탬프’(food stamp)와 같은 사업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지 검증한 결과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전하면서도 “본예산에 포함돼서 사업 추진이 확정되면 수혜 대상 범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소요 예산이 추후 늘어날 가능성도 있어 재정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해 식품 구매 여력이 줄어든 도시 빈곤층을 지원하기 위해 1939년에 푸드 스탬프(SNAP, 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를 도입했다.
체크카드와 유사한 방식으로 빈곤 가구에 지급된 카드에 매달 지원금이 자동 입금되는 방식이다. 이 사업은 올해 미 농무부 예산 중 단일 프로그램으로는 가장 많은 51%의 비중을 차지한다.
KREI에 따르면 이 사업은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을 15억4000만달러 증가시켰고 1만356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농업 소득도 3200만달러 규모로 늘어났다. 1달러의 농식품을 지원할 때 약 1.77~3.13달러의 의료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도 나타났다.
◇바우처 도입 농업계도 지지…예산 당국 결심만 남아
국산 농산물에 대한 수요를 확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농업계 역시 사업 도입을 지지하고 나섰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지난 25일 낸 성명에서 “우리 농업이 자생력을 가지려면 신규 판로 확보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바우처 사업을 도입하면 안정적인 수요처가 확보되기 때문에 농산물의 가격 안정과 수급 조절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내년부터 시범 사업을 반드시 시행하라”고 촉구했다.
한농연은 특히 이 사업이 기존 복지 사업과 중복되지 않게 설계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보건복지부 산하 사회보장제도 심의위원회 심의에서 중복성 검증을 통과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는 설명이다.
중위소득 30% 이하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현금을 지원해 의복, 음식물, 연료비 등으로 지출할 수 있게 하는 복지부의 ‘생계급여’ 제도와 달리 바우처 사업은 농식품이라는 현물로 한정하고 있다. 사업 대상 역시 중위소득 30% 이하 생계급여 비수급자 중 65세 이상, 5세 이하를 포함하는 가구로 좁혔다.
결국 예산 당국의 결정만이 남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농업 분야 전문가는 “기재부의 고민은 알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선 이런 제도가 필요하다”며 “앞서가는 국민 의식에 맞춰 여러 정책이 개발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예산이 따라가질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가는 “국가는 선진화돼 가는데 서민과 취약 계층의 혜택은 굉장히 적은 구조”라며 “투입 대비 성과에 치중하는, 과거 1970~1980년대 불균형 성장 시절 만들어진 예산 기준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꼬집었다.
/명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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