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은 자기 존재의 핵심, 중심을 의미한다. 가슴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식의 가슴을 보기위하여 방향을 바꾸어 눕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본다. 외모를 보면 실패할 확률이 크다. 그것은 불륜이 될 수도 있다.
신부, 목사, 스님들의 수도(修道) 시간도 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상가요, 정치인이었던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신실한 신앙인이 되지 못 한다, 고백을 한다. 기도하며 가슴을 치며 기도 한다고 말한다. 열린 가슴을 위한 절박함의 상징이다. 부모는 자식을 대하면서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한다. 눈으로 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이는 현상만을 논하면 실패할 확률이 크다.
정원사가 가지를 치기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나무와 꽃들의 뿌리까지를 알아야한다. 보이는 것들로 가지치기를 하면 훌륭한 정원사는 아니다. 사소한 설명 같지만 내과 의사가 내원 환자의 얼굴을 보고 병세의 깊이를 팔 할 정도 진단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쉬운 설명이 된다.
시대와 대화를 하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보이는 것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 내면의 세계와 상대의 뇌와 대화를 한다.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과의 대화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 동양 사람은 마음을 주고받는 다고 할 때 가슴으로 손이 간다. 서양 사람들은 마음이 통한다 할 때 머리(뇌)를 가리킨다. 과학에서는 마음은 뇌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보면 서양 사람들이 마음을 말하며 뇌를 가르치는 것이 보다 과학적일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일본인들은 풍수지리를 매우 숭배한다. 일본인들은 남천이라는 식물을 심어서 귀신이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다는 설을 믿는다. 21세기 과학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나무를 통하여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거야 말로 눈으로 보이는 것들의 실상을 말한다.
일본의 정원을 말할 때 규제적인 정원을 가꾼다고 표현한다.
독일인들의 정원은 엄격함이라고 말한다. 규제적인 것이나 엄격한 정원의 의미는 자연의 상태를 규제하거나 인위적인 모습을 말한다.
정원을 가꾸는 것에서 규정과 엄격을 논하는 것에 의미를 두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을 안다는 것,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 다는 관점이다.
우리 조상들은 정원을 가꾸면서 자연 속에 융화를 중시하였다. 한국의 옛 학교를 서원(書院)이라고 한다. 서원의 모습은 자연 속에 교실을 만들고 자연 친화적인 정원 속에 학교를 지었다.
자연을 손상하지 않는 내면의 모습이다. 눈이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보자는 교육의 태도다.
물론 유럽의 귀족이나 백작들의 정원도 자연친화적인 것들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국민성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여름과 겨울이면 학생들과 해외여행 을 수년째 수행 하고 있다. 1차 독일에서 현장수업을 마치면 한국의 꽃 장식을 전시한다. 물론 현지에서 생산되는 나무와 꽃들이다. 그리고 인접한 국가에 여행을 떠난다. 목적은 해외의 보이는 것들을 위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아닌 타인의 삶을 통하여 내면을 읽자는 현장 교육이다.
우리가 아는 위인들은 내면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고 뇌가 말하게 하는 분명, 사람과 사람사이를 잇는 키워드다.
이번 여름 여행에서도 보이는 것이 아닌 내면의 소리를 담아오자. 처음 시작한 새 마음을 담아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