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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읽어주는 여행

최창일 광운대 명예교수·한국문인협회대변인
작성 : 2018년 06월 19일(화) 16:13 가+가-

요즘 서점에 나가면 전 영국주제 북한 대사관 공사 태영호의 저서, ‘태영호의 증언:3층서기실의 암호’가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평양 외국어 학원에 입학을 원하자 부친은 ‘미국놈 말을 왜 배우냐’는 반대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태영호는 영어를 하였기에 영국으로 공사를 나갔고 한국에 와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무거움에서 가벼워 지기위해 예능인 이야기 토막을 한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예능인 박경림은 잘 나가는 전성기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준비하는 길이 멀리 가는 방송인이 될 것이라 예측 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결혼식을 올리며 초청장 1200장을 돌렸다. 상상을 넘어서 5천명의 하객이 오는 기록을 남겼다. 그의 인맥에도 모두가 놀랐다. 지금의 박경림은 명사들의 북 콘서트와 영화 시사회 진행자로 명성을 더 하고 있다. 유학으로 다진 영어의 덕을 보았다. 영어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화화만이 아니다. 다양한 시선을 말한다.
독일에서 333년 전 태어난 헨델(1685~1759)도 영어가 능통하여 음악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게 된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바흐(1685~1750)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 부른다. 헨델은 독신주의자다. 헨델의 아버지는 이발사이자 외과 의사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걱정하며 유언을 남겼다. “법률가가 돼 집안을 일으킬 것” 당시 독일에서는 궁전, 교회 등 제한된 공간에서만 음악이 연주돼 일자리가 부족했다. 음악가의 삶도 고달팠다. 헨델은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중퇴를 하고 만다. 헨델은 음악으로 전공을 바꾸고 음악은 물론 영어에 매진했다. 독일 사람이면 영어를 잘 할 것으로 생각 하지만 오늘이나 당시에도 독일인에겐 영어가 쉬운 외국어는 아니다.
헨델은 영어가 능통하기에 국경을 넘나든 코즈모폴리턴으로, 통속적인 오페라부터 천상의 오라토리오까지 다양한 음악을 작곡했다.
영어가 유창한 헨델은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유럽 음악의 변방인 영국. 경제가 급성장하며 오페라에 수용가 늘었지만 음악가는 부족했다. 영국의 왕실과 상류층의 취향을 간파했다. 헨델은 영국 왕실 음악원을 창설하고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를 초청해 문화시장을 키우는 경영의 수완도 발휘했다. 40대 초반에는 영국인으로 귀화를 한다. 주식에도 관심을 보이며 큰돈을 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관심을 보인 헨델에게는 외국어가 운명을 바꾼 결과다. 인생은 늘 굴곡이 있는 것일까.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파산하고 중풍까지 걸려 반신불수가 된다. 하지만 헨델은 유황 온천으로 유명한 아헨을 찾아가 의사의 처방보다 2, 3배 긴 시간을 온탕에 머물며 적극 투병했다.
기적적으로 완치된 헨델은 오라토리오에도 도전한다. 24일 만에 완성한 ‘메시아’의 초연은 174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소박하게 이뤄졌다.
인생은 고난의 뒤에서 박수를 받게 한다. 헨델은 50대 후반에 예술가의 삶이 진한 감동으로 결실을 맺는다. 런던 코번트가든 왕립오페라극장에서 국왕 조지 2세와 관객들의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는다. 지금도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절정에 청중이 기립한다. 이것은 333년 전부터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말년에 실명은 했지만 음악활동을 계속되었다. 국민 음악가의 반열에 선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헨델의 음악가적인 정신은 현대 예술가에 시사 한바가 크다.
정명훈과 정명화를 비롯한 한국의 예술가들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것은 헨델과 같이 어릴 적부터 영어를 읽어주는 생활이 큰 역할을 하였다. 빙상의 김연화가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 것도 모두가 영어를 읽어주는 여행자였다는 것이다.
눈을 열어주고 여행을 빛나게 하는 것이 언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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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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