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은 중국 땅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한지 99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지 9년만인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 민족의 독립의지를 모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정부로 지금의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해방사에서 27년이 넘도록 해방운동을 전개한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유일하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속속 진행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또한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신중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대두된 임시정부수립은 일제가 서울에 설치한 조선총독부에 맞서 조선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1919년 4월10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인 김 신부로에서 여러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단에서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인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2일에는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중국령, 러시아령, 미국령 등 3개지역대표가 각각 지역선거를 통해 의정원의원을 선출해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던 것이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과 임시대통령 선출 등 오늘날 국회와 같은 기능을 발휘했는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후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리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마침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당시 상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관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미국의 조계가 있어 일본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벋어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때 임시정부가 내걸고 투쟁했던 독립운동은 단순한 소 집단적 항쟁차원이 아닌 이념을 동반한 광복 정책적 측면에서 국가적·정부적 기능으로서의 면모와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임시정부 27년의 세월은 제1기인 상해시대(1919~1932)와 제2기 이동시대(1932~1940), 제3기 중경시대(1940~1945)로 구분할 수 있다.
맨 처음 시작된 상해에서는 1919년~1932년까지, 두 번째는 항저우시대로 1932년~1935년까지, 세 번째는 전장시대로 1935~1937년까지, 네 번째는 창사시대로 1937년~1938년까지, 다섯 번째로 광저우시대는 1938년 7월~1938년 10월까지, 여섯 번째로 류저우시대는 1938~1939년까지, 일곱 번째로 치장시대는 1939년~1940년까지, 여덟 번째로 충칭시대는 1940년~1945년까지 총 8회에 걸쳐 임시정부는 옮겨 다녀야 했다.
지난 1990년부터 정부는 지금까지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을 4월13일에 맞춰 공식행사를 해왔는데 100주년이 되는 내년부터는 4월11일로 옮기기로 했다.
그동안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일을 1932년 중국 상해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경찰정보자료를 주된 근거하여 4월13일로 해왔는데 광복 직후인 1956년과 이듬해인 1947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기념식 사진에 4월11일이라는 날짜가 명확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최근에 공개된 임시정부달력에는 4월11일이 3·1절과 개천절이 함께 국경일로 표시되고 있고 정부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내년부터는 기념일을 4월13일이 아닌 4월11일로 바로 잡는다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힐것으로 알려져 비록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정확한 날짜로 바로 잡는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기념일 99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의 건국역사를 제대로 정립하여 올바른 역사의식을 후손들에게 심어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