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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첫 여성 세계 일주, 나혜석의 미투
최창일 광운대 명예교수·한국문인협회대변인
작성 : 2018년 03월 13일(화) 16:31 가+가-
나혜석은 100년 전, 첫 조선 여성으로 1년 반 동안 세계 일주를 했다. 그에게는 한국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최초 서양화가로 일본유학을 한 나혜석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다.”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조 한다.”라는 주장을 했다.
그의 말이 지금은 평범하게 들릴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파격적이며 매우 도발적이었다. 그래서 ‘시대와 불편한 나혜석’으로 평가했다.
1934년 나혜석이 <삼천리>에 실은 글 하나가 현재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미투’(#MeToo)와 같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100년 전 나혜석의‘미투’는 한국은 물론 세계 최초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지현 검사의 미투는 나혜석을 이은 두 번째인 셈이다.
“조선의 남성의 심사는 이상 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혜석은 1934년 <삼천리> 8, 9월호에 ‘이혼고백서’에 적었다.
세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의 글은 멈추지 않고 시대와 정면으로 맞섰다. 당시 여성에게는 목숨과도 같았던 정조를 선택의 문제로 돌린 사건으로 ‘나혜석’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 펄펄 끓는 명사였다.
이후에도 그는 “여성에 앞서 평등한 사람이다.”라는 외침을 계속했다.
이 같은 나혜석의 평범을 뛰어 넘는 사고와 외침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혜석의 시대를 앞선 행동은 ‘세계 여행’을 통하여 보고 느낀 것이었다.
1921년에 조선 여성 나혜석은 홀로 세계여행을 나섰다.
나혜석의 눈으로 경험한 세상은 자유롭고 평등했다.
런던에 머물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던 사람에게 영어를 배우며 여성 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의 여성은 여름이면 다리미질을 하고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하는 것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기정과 최시의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나기정은 대한제국 시기에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등을 지냈다. 일본이 통치할 때에는 용인군수를 지내는 등 지배계층에 속하는 부르주아였다.
나혜석은 수원의 삼일여학교를 거쳐 진명여자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3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무엇을 보면 연필로 곧잘 그렸다. 여학교 시절에도 그림실력이 뛰어나 그의 그림이 학교의 벽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두 오빠가 일본에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유학길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나혜석은 일본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의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틈틈이 계몽소설을 발표하며 여성 계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비밀집회를 열다가 체포되어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때 도쿄유학시절부터 그녀에게 구애했던 김우영의 변론으로 무죄로 풀려났다. 그것이 인연이었을까. 이듬해 그와 결혼했다.
나혜석은 1927년 남편 김우영과 2년 동안 유럽을 여행하며 파리에서 피카소, 마티스, 마리, 로랑생 등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세계도 야수파의 영향을 받으며 <무희> <누드> 연작은 대담성을 보인다. 그의 그림은 일본식 관학파적인 화풍을 탈피하여 인물의 신체를 변형, 거칠고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는 유럽에서 그림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선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부부관계와 결혼생활을 직접보고 사상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가부장제도에 대한 비판을 심화 시켰다. 그녀의 여행은 화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큰 전기의 발전과 불행의 시작점이 되었다. 시대를 앞서 가는 자의 영광이자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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