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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장군인가? 의사인가?
김철수 아동문학가·美솔로몬대학교한국학장
작성 : 2018년 10월 28일(일) 16:38 가+가-

지난 26일은 독립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장군의 하얼빈 의거 109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가 순국한지 109년이 되기까지 그에 대한 호칭하나 통일시키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니 고인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호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서울대 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학술대회에서 안중근의 거사 직후 일본법정에서 이 사건을 ‘총 잘쏘는 한 포수가 저지른 살인행위’로 왜곡시켰는데 이에 대한 주장을 지금이라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안중근 의사가 스스로 자기의 호칭을 장군으로 불러달라고 법정에서 주장했고 행동의 유형도 다분히 장군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수년전 육군본부 계룡대에서는 대회의실을 ‘안중근 장군실’로 명명해서 사용 중이고 경기도 부천시에 세운 안중근 동상도 안중근장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전남 함평의 상해임시정부청사 앞에도 안중군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그는 1879년 지금은 북한 땅인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과 모 조성녀(마리아)의 사이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응칠이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조부님이 운영하는 한문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무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94년 황해도 지역에서 16세의 어린나이로 부친을 도와 동학군에 대항하여 선봉장을 맡아 용맹을 떨쳤고 이 때 김홍섭의 딸 김아려와 혼인을 하게 되어 장녀 현생(`902)과 장남 분도(1905), 차남 준생(1907)등 2남1녀를 두었다. 1897년 빌렘(홍석구)신부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서구문명의 신지식을 배우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비롯한 안중근 일가는 진남포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 인재양성의 시급성을 절감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한 후 돈의학교까지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다.
1907년 안중근은 항일투쟁을 위하여 러시아로 망명한 후 의군활동을 시작했는데 1908년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해조신문》(대동공보)에 조선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국권을 회복하자며 <인심결합론>을 발표했고 대한의군을 지휘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결행한 바 있었다. 1909년 2월 안중근은 러시아 연추에서 동지 11인과 일명<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大韓獨立)의 네 글자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그는 1909년 10월19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10월20일에 일본의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시찰을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0월20일 오전 7시경부터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다가 오전 9시30분 조선침탈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또를 처단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거사를 끝낸 그는 즉시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그날 밤으로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고 11월3일에는 관동도독부 뤼순감옥으로 옮겨 수감되었다. 11월 6일에는 <안응칠 소회>를 작성한 후 일본관헌에게 넘겼고 12월13일부터 일경의 요구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수감 중에 집필을 시작했다. 1910년 뤼순감옥에서 주변 일본인들의 간청에 의해 직접 200여점의 붓글씨를 썼으며 1910년 2월14일 관동도독부 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법정에서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의 15개 항목의 죄목을 만천하에 낱낱이 밝혔다. 사형선고를 받은지 3일 후인 1910년 2월17일<동양평화론>의 저술을 시작했고 3월15일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만 30세의 나이로 순국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장군의 업적을 기려 지난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호칭하나 통일시키지 못한 오늘의 추태를 보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통이 터진다. 필자의 견해는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호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 장군이라는 호칭이 단순하게 오늘날 국방부에서 사용하는 계급적인 의미로 서가 아니라 국가가 위기 때 목숨을 바쳐 구국을 행동으로 옮기다 순국하신 분들에 대해 상징적이고 포괄적인 무관을 호칭하는 의미로 봐야한다.
현대역사에 대한 혼돈을 야기 시키는 독립투사의 호칭하나 통일시키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 어떻게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켜야할지 눈앞이 캄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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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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