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은 제572돌을 맞은 한글날이다. 한글은 국보 70호로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보물이다.
동남아시아 태국에서는 최근 한국어 열풍을 반영하여 최근 한글을 제2외국어로 선정하고 공식인정한 한글교과서를 출간하여 태국의 150여 개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3만여 명에게 가르치게 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글을 사용하는 겨레이다. 디지털시대에 세계 어느 나라 말이나 글보다도 가장 빠르고 쉬운 과학적인 글자인 한글을 가지고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국가는 물론 범국민적인 노력과 경주가 뒤따라야 한다.
오늘날 한글이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 사용하게 된데는 한글타자기의 발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한글타자기 하면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가 떠오른다. 1907년 1월24일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출생한 공 박사는 한글기계화의 아버지요 맹인의 아버지, 사진작가, 컴퓨터 연구가, 민주투사, 애국자, 한글운동가, 발명가 등 다방면에 걸쳐 평생 동안 단 한 시간도 허비 없이 숨 가쁘게 살다가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95년 3월7일에 88세로의 일기로 타계한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는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최초의 한글타자기의 발명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삶의 10대 기둥이 있다. 첫째는 빨리빨리 주의의 선구자로 시간은 금보다도, 돈보다도 더 소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이었다. 공박사는 일생 동안 ‘빨리빨리’를 생활신조 제1조로 삼고 숨 가쁘게 살아왔다.
공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방의 문지방을 톱으로 썰어 낸 것도 청소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셨고 사과궤짝을 두 개 놓고 침대를 만들어 사용한 것과, 5분 이상 걸리는 이발소에 걸리는 이발소에 가지 않는 것과, 낮에 하는 결혼식에 가지 않는 것도, 멀쩡한 양말의 위쪽고무줄을 가위로 잘라서 신었던 것도, 미리 약속하지 않고 오는 손님을 되돌려 보내는 것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과 화장실에 냉장고를 설치하는 것도 그 유명한 공안과 개업 및 몇 주년 기념식 한번 하지 않은 것도 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공병우 박사의 ‘시간은 생명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 철저한 실용주의자요 삶의 합리주의자였다. 공박사의 또 다른 철학이 있으니 정직이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 80살이 되었을 때에 자기가 쓴 책의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고성능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김홍기 박사는 <웨슬리 신학의 조명에서 본 미주한인이민과 선교 백년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 제3부에서 한글타자기 발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초로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사람은 로나녹크 대학에서 상업을 전공한 이원익(Wonic Leigh)로 전해지는데 그는 1913년 84개의 키로 이루어진 최초의 타자기를 발명했다. 그 후에 송기주(Keith C.Song)는 공병우타자기의 원조인 송기주 타자기를 발명하였다. 그는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25세 때인 1925년에 도미하여 택사스 주립대학교 에서 학사학위(B.S)를 받고 1926년 시카고의 랜드 멕넬리 회사에서 지도 제도원으로 일하면서 시카고대학교 대학원과정을 이수하다가 뉴욕으로 갔다. 그래서 그는 시카고에 머무른 동안에는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의 교인이었고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뉴욕한인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시카고에 있을 때 한국지도를 최초로 서구식 입체본으로 제작하였으며 한글타자기를 고안하여 7년간 연구 끝에 1933년 뉴욕의타자기 제조회사 언더우드(Under Wood·Elliott-Fisher)와 제작에 합의하였다. 종전에 타자기가 있었으나 자판이 복잡하고 타자열이 고르지 않아 실용성이 없었는데 언더우드-송지구 타자기는 42개의 키로 현대 체 한글을 고르게 찍을 수 있는 타자기로 각광을 받았다. 공병우 박사가 밝힌 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타자기의 발명가는 재미교포인 이원익 선생이다.
공병우 박사는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고성능한글타자기이다.
지난 1993년 10월 한글날 한글유공자 4명에게 훈장을 주었는데 공병우 박사께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