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수확의 계절이다.
시한편이 떠오른다. “하늘이 누구의 허락을 받음인지/ 햇살을 자유로이 굴리고/ 무게를 견딘 과일들의 볼을 쓰다듬어/ 붉게 눈을 뜨게 하는가/ 바람의 깃에도 단풍잎의 채색이 물들여/ 황홀한 외출을 서 두른다/ 가을 들끓는 빛의 끝에는/ 톡 쏘는 사랑의 질투가 숨 쉬고 있다/ 툭하고 떨어지는 건 마음의 노래일까/ 참된 기도는 하늘까지 닿는 법/ 그 꽃잎 이슬로 목축이고/ 별들이 고요히 숨 쉬며 빛으로 송편을 빚는/ 가을걷이 타작마당에 서 있는 당신을 본다” 시 <가을의 기도>의 풍경을 떠 올리며 천진한 낭만을 그려본다. 낭만이 없는 노벨상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지난주부터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을 발표한다. 그들은 하나 같이 책상 앞이나 연구실의 학자가 아니었다. 즐기며 연구하고 때로는 가을의 시를 읽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노벨상의 발표와 함께 나라별 역대 수상자가 오르내린다.
우리나라는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를 되묻곤 한다. 이웃나라 일본이 노벨상을 받으면 반성과 자괴감은 더 커진다.
금년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인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대 명예교수가 눈에 띈다.
51세가 돼서야 교수가 되었고 85세의 고령의 학자다. 그가 수상의 소감에는 우리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유의 답이 나온다.
그는 쉽게 논문을 쓰고 연구비를 받기위해 유행하는 주제에 눈길을 돌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효모를 통해 세포의 기본원리를 풀 수 있다고 믿으며 40년 지기 친구로 삼았다. 술을 좋아 하는 오스미 교수에게 효모는 향이 좋은 실험 재료로써 안성맞춤이었다.
프랑스도 지난해에 이어 연속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노벨화학상을 받은 장-피에르 소바주스트라스부르대 명예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영국출신의 프레이저 스토다트 미국 스스웨스턴대 명예교수, 베르나르트 페링하 네델란드 흐로닝언대 교수와 함께 그는 분자기계의 설계합성을 성공시켰다.
노벨위원회는 “오늘날 분자모터는 핸들과 바퀴를 전시했던 1830년대 전기모터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 작은 기계들은 물질의 분자를 각각의 부품에 사용해 조립할 수 있어 새로운 물질이나 센서, 에너지 저장시스템과 같은 물질 개발에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500편의 논문을 발표한 소바주 교수는 “매우 놀랍고 큰 기쁨을 맛본다”면서도 노벨상을 기대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번 소바주, 오스미 교수의 노벨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돌아봐야 할 점이 있다.
두 사람은 연구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기보다 즐기면서 창조를 이뤄 냈다는 것이다. 소바주 교수는 음악과 여행으로 상상력을 키웠다 오스미 교수는 유행을 좆기보다 고집스럽게 효모를 사랑하며 효모냄새가 좋아 술을 즐기기까지 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삶이 아닌, 자기만의 독창적인 삶을 살았다.
그들이 오랜 연구가 결실을 맺게 된 비결이 여기에 있다.
프랑스와 일본의 학자들이 연속적으로 노벨상을 받는데 한국은 뭐하고 있느냐는 질타가 나온다.
두 사람의 학자의 경우를 비교하면 우리에게는 헤소마가리(자기만의 고집) 정신이 부족하다.
자기 인생을 자기만으로 눈으로 보지 않고 타인의 눈에 맞춰야 하는 한국의 동조문화가 기초연구의 장기투자에 인색하다는 것이다. 별난 학생이 살아남기 어렵다. 선행 학습이나 시험을 잘 푸는 선수가 되어야 하는 현실의 교육이다.
오스미 교수는 자연 속에 뛰놀았다.
즐기는 학문이 노벨상을 받게 하였다.
오스미 학자를 보면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이유, 답이 나온다. 창조는 여유와 사색, 자유 속에서 잉태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면 우리는 영원히 노벨상을 받는 나라만 처다 보게 된다. 우리 사회의 현 시스템이 바뀌어 노벨상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현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