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을 맞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강제 합병에 따라 식민통치가 35년동안 진행되는 동안 겪은 민족의 수난사는 세계 어느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한마디로 포악 무도한 일본의 찬탈행위는 그 오만함이 극에 달했지만 해방 71년을 맞는 현재까지 위한부 문제 하나 제대로 하결되지 못한채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파렴치함은 오히려 그 도를 높여 가고 있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항복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항복문서는 시종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데 그치고 항복이라는 단어하나 사용되지 않았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배경과 내용은 미국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원폭투하의 1년분을 쌓는 과정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할 여지는 없다.
포츠담 선언은 2차 대전 종전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중국, 영국 3개국 수뇌 회담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문이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이미 5월에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항복한 후 였고, 이제 전쟁은 유럽이 아닌 태평양 전쟁에 쏠려 있었다. 이 선언문은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2차 대전 이후의 대일 처리 방침을 표명한 것이었다.
포츠담 선언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가 회담에 참가 했다.
이에 앞선 얄타 회담때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 공산당서기장 스탈린도 이 회담에 참가하고 이 선언문에 함께 서명하였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로하고 원자탄제조 맨해튼 프로젝트(암호명)을 수립하는 과정은 미국의 국력과 저력을 여실히 나타내는 놀라운 힘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결정적 무기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개발 인력 12만 5천명과 자금 22억 달러를 투입 원자탄 개발에 임했고 1945년 7월 16일 세계 최초의 핵폭단 실험이 있었다.
당시 폭발과 동시 높이 15km, 폭 1.5km의 거대한 버섯 모양 불꽃이 대지를 덮었으나 이때는 누구도 핵폭탄실험인지조차 몰랐다. 단순한 무기폭발 사고쯤으로 안 것이다.
이 사실은 즉각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 되고, 열흘후인 1945년 7월 26일 자신감을 얻은 미국의 주도하에 포츠담 회담이 열리고 이 선언문은 일본이 항복할 것을 최후통첩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일본이 이 선언문을 받아 들여 쉽게 항복할 것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항복을 기대하기보다 미국이 10일전 실험을 통해 그 위력을 확신한 세계 최초의 원자탄을 투하할 명분을 쌓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포츠담 선언 10일후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B29 전폭격기에 실린 U-235 원자폭탄이 드디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이때 6만여명이 일시에 즉사하고, 반경 2km에 풀 한포기 남지 않았다.
3일뒤 다시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재차 투하 3만 6천명이 즉시 사망하고, 그후 히로시마에 14만명, 나가시마에 7만명동 21만명이 사망한 후 일본천황은 1945년 8월 15일 항복문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8·15해방을 맞아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35년간 일제의 억압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천황은 이제 전쟁은 그칠 것을 명시하고 패전을 시인한 것 외에 이 와중에도 ‘항복’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은채 전쟁수행에 대한 명분만을 나열하였다.
이는 일본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요. 독도를 자기네 영표로 주장하는 현재의 일본은 전혀 변함이 없음을 광복 71주년을 맞아 더욱 명심해야 할 우리의 과제임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