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이란 말이 6월을 대신할 정도로 우리의 귀에 익숙해져 있다.
이 말의 뜻은 ‘나라를 지킨다는 ’호국(護國)‘과 공에 보답한다는 보훈(報勳)의 두 단어가 합쳐진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6·25 한국전쟁은 커다란 비국의 역사였고 그 상처는 6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물지 않을 정도로 깊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 분연히 일어나서 자기를 희생한 선열들을 기리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오늘날 ’호국보훈‘의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변질시키는 일들이 난무하고 있다.
1950년 6월 25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의 인민군이 전면 남침 했다.
국군은 전군에 암호명 ’폭풍‘을 하달했고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 1.2.3.4.6.12.사단과 제105전차 여단이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국경을 넘어 침공했고 북한군 선두부대는 임진강을 건넜다.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 지상군 4-5만 명 및 전차94대가 남침을 개시했다고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UN 한국위원회와 긴급회의를 통해 평화적 해결희망, 정부각 기관은 비상사태에 돌입, 신성모 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은 미국에 긴급 무기원조를 요청했다.
UN 한국위원회는 북한 측에 즉시 전쟁 중지를 요구하며 평화회담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라고 방송을 했다.
또한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한반도의 전쟁중지와 북한군의 38도선 철수를 결정 미국이 요구한 정전 요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한국에 무기 긴급공수를 결정했고 트르먼 대통령은 38선 이남지역에 국한된 미 해군과 공군의 작전을 승인했다.
이 때 파병을 지원해 준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틸리아의 침공을 받아 항전하다가 패배했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제네바 국제 연맹에 가서 세계 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나라도 응해주지 않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할 수 없이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에게군사 훈련을 시켜 1941년 이탈리아군을 에티오피아에서 급기야 축출하고야 말았다.
그 후 UN이 설립되자 그들은 자기나라와 같은 나라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모두 힘을 합해 약한 나라를 도와주자는 취지의 ’집단안보‘제도를 주장했다.
UN은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 집단안보는 세계평화를 위한 진보적 발걸음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리고 첫 번째 발발한 전쟁이 바로 우리나라의 6·25 한국전쟁이었다.
셀라시에는 이 때 집단안보를 주장하며 UN에 한국을 돕자고 제안했고 그는 왕실 근위대인 ’강뉴 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강뉴‘란 에티오피아 말로 ’혼돈에서 질서를 회복한다.‘ 란 뜻과 ’초전박살‘의 뜻을 갖고 있다.
셀라시에 황제는 파병 사에서 “우리 에티오피아가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 위해 오늘 그대들은 장도에 오른다.
가서 침략군을 격퇴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고 말했다.
강뉴 부대는 16개국 참전국 가운데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5차에 걸쳐 6037명이 참전했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
그 이유는 이기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어떤 병사는 월급을 고국으로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란 고아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먹여 살리면서 잠 잘 때도 두려워 떠는 아이들 옆에서 같이 자기도 했다.
전쟁 후 에티오피아는 7년 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시달렸고 목축업을 주로 하던 그들에게 물과 풀이 없어 극빈국가가 되어 한 해 100만 명이 굶어죽기도 했다.
가난에 시달린 군중이 봉기해 1974년 맹기스투라는 군인이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국가로 바뀌고 셀라시에 황제는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강뉴 부대원들은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죄로 투옥되거나 재산을 몰 수 당하고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되어 6·25참전사실을 숨긴 채 이름마저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게 된 것이다.
그 후 다시 에티오피아는 민주정부로 바뀌었지만 6·25참전용사의 가족들이나 자녀들은 아직도 가난과 질병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6월이 다가기 전에 이들을 범국민적으로 돕는 운동이라도 펼쳐서 이들의 희생과 사랑에 보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