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이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다. 국악의 자랑인 송소희가 대중가요를 부르면 멋들러지고 예술성이 큰 것을 느낀다.
클래식의 사전적 의미는 오랜 시대에 걸쳐 현재도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예술 작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클래식하면 마치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연주 한다거나 거장들의 음악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클래식방송을 전문으로 내보내는 데에서도 그 오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쉽게 말하면 아리랑도 클래식이다. 한국인들에게 오래도록 불러지고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리민요 ‘산타 루치아’ 이탈리아 대중가곡‘칸초네’는 한 예다.
우리의 아리랑은 산타 루치아, 칸초네처럼 세계적이지 않지만 우리에겐 엄연히 클래식이다.
우리의 아리랑도 하루속히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도록 하여야겠다. 우리나라에는 조수미 같은 세계적 성악가가 많다.
그들이 ‘아리랑’을 자주 부르게 되면 세계적 클래식이 될 날도 멀지 않다.
한국 사람에게는 장벽이라는 것이 매우 강하다. 정치에서도 그러한 사례로 홍역을 치루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위 청산이라는 서민행보를 걸었다.
정치 9단이라는 고 김영삼 대통령도 그러한 태도에 의견을 달리하고 신랄한 지적을 하였다.
그러나 국민은 권위주위에 대한 탈 권위에 박수를 보냈다.
성악을 하는 사람이 대중음악을 부르면 마치 권위주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나 피해를 당하는 것으로 간주 한다. 25년 전으로 기억된다.
한국성악의 대부인 테너 박인수 교수가 ‘향수’라는 곡을 대중가수와 불러 클래식계의 큰 비난을 받았다.
그것은 장벽의 권위주위다. 대통령의 언어가 따로 있고 성악가는 대중가요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다.
이제는 국악을 하는 사람이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상식이고 자연스러운 태도다. 국악의 자랑인 송소희가 대중가요를 부르면 너무 멋들러지고 예술성이 큰 것을 느낀다.
지금 미국에도 트럼프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기존 정치의 용어와 동떨어진 대중적인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고 소재도 소시민적 내용을 담고 있는 데에 기존 정치권과 보수적 사고의 국민들과 부딪히는 것이다.
사실 벗어 버리고 보면 권위주위라는 것도 그저 그런 것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의식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에 와서 양반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위화감이 크고 소외를 받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시대는 칸막이를 내린지 오래다. 이것을 쉽게 말하여 소통이라고 한다.
대중을 상대로 한 방송들도 이같이 소시민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다.
과거의 방송은 특권층의 이야기나 화려한 이야기가 방송의 품위를 만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모든 프로가 서민밀착이라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대중가요를 비롯한 많은 부분들이 장벽이 크다. 양의와 한의사간에 그렇다.
양의가 쓰는 의료기기를 한의사가 쓰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의 의료가 우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내지는 밥그릇에 열심이다.
일부에서는 협진(協診)이라는 방법으로 허물어지고 있음에도 큰 틀의 싸움은 오래도록 국민을 피곤하게 한다.
명곡은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의 사랑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대중의 사랑이 없으면 명곡이 되지 못한다. 명곡이 클래식이듯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이 명의 이고 큰 정치인이다.
훌륭한 곡은 대중가수, 성악가, 뮤지컬배우, 기악 연주자들이 자유자재로 넘나들 때 그것은 빛을 발하게 된다.
한국인처럼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K팝을 통하여 이미 세계의 장벽을 허물고 있다.
그러나 일부 정치, 문화, 의료계에서는 시대의 장벽이 무엇인디를 모르고 살고 있다. 아니다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몰라라 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박근혜대통령도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허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중과의 불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