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TV 사극의 대부 신봉승, 먼 길 떠나다
최 창 일 예능시인·한국문인협회 대변인
작성 : 2016년 04월 26일(화) 18:35 가+가-
조선왕조 500년 사극, 드라마의 신(神), 신봉승작가가 19일 8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같은 시간 뉴욕의 경매시장에선 조선 불화가 20억원에 낙찰, 한국의 고화가 미국시장에 관심을 모으는 경매가 진행되었다. 조선의 16세기 불교 미술을 이끈자는 문정왕후(1501~1560)다. 금을 개어 만든 안료로 정교 하게 석가모니 부처와 그의 제자들을 그린 ‘설법도’ 형식의 불화는 조선의 불화의 시작과 전성기를 이어갔다.
신봉승 작가의 타계에 느닷없이 불교 미술 경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역사란 누가 어떻게 끌어내는가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런 걸 역사의 아니러니 라고 할까.
뉴욕의 미술시장에서 한국의 불교미술이 높은 가격에 경매가 된 사실은 매우 드문 경우다.
문정왕후의 불교 미술의 관심은 21세기 한국불교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듯.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신봉승이 드라마 작가로 변신은 사극드라마에 새로운 서막의 시작이 되었다. 당시 조선 왕조 500년은 한국 방송사에 다시는 나타 날수 없는 시청률 70%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드라마나 운동경기의 시청률 50%대만 되어도 거리는 한산하고 택시는 휴업이 된다는 정설이 있다. 70%라면 80년대의 거리는 정적이 감돌법하다.
명성황후의 부군이 고종황제라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단지 일본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었나는 것을 아는 정도다. 신봉승 작가로 말미암아 명성황후의 아픈 역사를 알게 된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풍운아, 한명회를 오늘의 역사의 심판에 다시 올린 것도 신봉승의 사극드라마 힘이다. 세종대왕의 측근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수양대군을 즉위시킨 천하의 몰이 배로 알려진 한명회. 압구정은 한명회의 권세를 상징한다. 압구정을 지은 후 많은 사람들에게 압구정을 찬양하는 시를 지으라고 했는가 하면 중국 사신의 주요 접대 처로 삼았고 사팔뜨기라고 알져만 왔다. 그가 73세로 떠날 때까지의 압구정실록을 다시고발 한 것도 신봉승 작가다. 한명회의 굴절된 모습. 신봉승 작가에 의하여 재조명의 기회를 얻었다. 그 뿐 아니라 신숙주가 부인에게까지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고 알려진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 주었다.
역사를 고증과 담쌓고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몰아가는 것을 신봉승에 의하여 정돈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 국방부가 300만환을 내걸고 시나리오 현상공모를 실시한다. 요즘으로 치면 3억원의 상금을 거머쥔 셈이다. 강원도의 초등학교 교사인 신봉승은 당시 현대문학으로 시인으로 등단도 하였다. 당시의 현대문학은 한국문단을 이끌고 대변하는 잡지였다. 오늘의 일간지 신춘문예에 버금갔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올라와 친구 20명을 나오게 하여서 유명 양복점의 옷을 맞추어 주었다. 그가 양복을 맞추어 줄때는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곧바로 원고 청탁이 줄을 이를줄 알았다. 그러나 연락하나 주지 않았다. 슬그머니 다시 강원도 올라왔다.
이때 시나리오를 쓴 게 ‘사모곡’ ‘연화’ ‘별당아씨’등 대한민국 사극의 1인자로 등극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등장은 야사중심의 사극을 방대한 독서와 고증을 통한 정통 역사물로 물꼬를 트게 되었다. 만 쉰 살 때부터 8년간 방영된 대표작이 조선 왕조다. 그 작품의 모태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국역이 되어 있지 않아서 혼자서 떠듬떠듬하다가 한학자의 도움을 빌려 2,3회를 걸쳐 완독하는 열정을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은 국역본 모두 413권. 하루 100쪽을 읽어도 꼬박 4년은 걸린다. 왠만해서 진력이 빠져 읽지 못한다. ‘나는 40년 세월을 그것을 붙들고 살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징비록’이나 ‘사도’같은 사극이 대중의 관심을 받은 것도 모두가 신봉승작가가 뿌린 씨앗의 결과다.
역사의 고증과는 담쌓는 사극이 주목받는 것은 우리 모두의 경계의 대상이다.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만남으로 정사(正史)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의 타계가 아쉽기만 하다.
그는 식민사관에 짓눌린 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을 바로 잡는데 기여한 점에 자부심을 표시했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늘 강조 한 말들이 새록새록 기억된다.
조선의 임금이 제 맘대로 한 적이 없다. 선비들은 임금에게 직언하고 배운 데로 행했다.
신하들이 무턱대고 따라 한 적이 없다.









편집팀 기사 더보기

tdh1234@naver.com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시군별뉴스

오피니언

기사 목록

대한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