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장미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소설 ‘장미의 이름’ 중 마지막 구절)
이탈리아 출신으로 21세기를 산 위대한 르네상스인이 이름을 아로 새기고 2월 19일 오후 9시30분(현지시간) 별세 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 말 수도원을 무대로 아리스톨레스의 ‘시학’ 제2권의 필사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다뤘는데 세계적으로 40여개 언어로 번역돼 5,0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장미의 이름’ 추리 소설은 왜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을 붙었을까. 소설의 내용과 접목하기 쉽지 않기에 평소 독자들은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움베르코 에코가 기자나 사석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받았다.
‘독자들로부터 이 책의 말미에 실린 6보격(步格)(그리스시대에 시인들이 시 형식으로 교훈시에 사용되었다. 19세게 세계적 시인 워즈워드나 휴 플러스가 사용하였으나 널리 이용되지 않았다)시구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것이 어째서 책의 제목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대답하거니와,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은 뒤로 남긴다. 이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답과 더불어,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해석을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원래 이 소설의 제목은,씌어질 당시 ‘수도원의 범죄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는 그 제목을 파기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밝힌다.
‘독자들의 관심을 미스터리 자체에만 쏠리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독자들이 액션으로 가득한 약간은 황당무계한 책으로 오해하고 책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작가들은 작품을 만들고서 제목을 붙이는데 무던한 심사숙고를 거듭한다. 몇 번을 고민하다 못해 주변의 지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몇 개의 제목을 여론조사를 하기도 한다.
얼마 전 ‘명량’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날렸다. 명랑이전에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여러 차례 나왔다. 그러나 모두가 흥행에 실패하였다. 영화의 제목이나 예술장르의 제목은 매우 중요하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만들면서도 무던히 고민하였던 흔적을 보인다.
에코가 처음 만든 ‘수도원 범죄사건’이라는 제목이었어도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행여, 장미라는 꽃이 꽃시장에서 85%의 점유율을 가지는 대중성일까.
사람들이 사랑의 표현으로 장미꽃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에코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난 2002년 계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린 한 대담에서 개고기문화를 비판한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에 대해 파시스트라고 일갈했다. 에코는 ‘어떤 동물을 잡아먹느냐는 인류학적문제다. 그런 면에서 바르도는 한 마디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우둔함의 극치’라며 상이한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관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에코는 2012년 한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책이 42개 언어로 번역됐다며 ‘한국은 내가 쓴 모든 책을 번역한 몇 안되는 예외적인 나라’라고 고마워했다.
에코는 지난해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인 ‘누메로 제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타블로이드 언론과 음모론 등을 다루며 현대 이탈리아 사회를 비판했다.
에코가 떠난 것은 아쉽지만 그가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을 남기고 간 연유를 우린 속 시원하게 알고 싶다.
초두에 말했듯 제목이 주는 뉴앙스는 독자들을 끌어 모으는 중요한 표적일 수밖에 없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그렇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이나 최근 흥행몰이의 ‘검사 외전’ 같은 제목도 같은 맥락이다. 구지 궁금하다면 와서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작자와 같이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에코는 기호학자이면서 소설을 집필하였다. 기호란 언어학이다. 기호학자가 가지는 원리들을 적절하게 녹이는 특수한 능력을 가졌다는 에코의 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소설로 독자를 불러 모으기 전에 제목이 먼저 불러야 한다.
에코는 기호학자로서의 책임을 소설 속에서 놓지 않았다.
신념과 고집은 다르다는 것. 독단과 확신도 다르다는 것이다.
신념은 내가 믿는 바를 확신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수렴해 물음표를 찍어보는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고집은 다른 의견, 생각에 귀를 틀어막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독단은 기억의 고집이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남들도 따라야 한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확신은 나 혼자 믿어도 좋은, 그러나 타인의 생각도 존중하는 마음의 지혜다. 에코의 이 같은 태도는 개고기를 놓고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를 꾸짖는 모습에도 보인다.
언젠가 지고 마는 장미일지도 모르는데, 가시가 앙상한 그 장미를 꼭 쥔 채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장미의 이름’으로 에코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