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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말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학평론가
작성 : 2022년 09월 13일(화) 16:39 가+가-
창백한 바람이 의식을 파고든다.
흐르는 밤 속에 튀어 오르는 붉은 바람들이 여기저기 노래한다.
가을 바다는 한없이 흘러가고 어디선가 첩첩이 둘러싼 숲의 말들이 무더웠던 여름의 뒤에서 이별의 악수를 청한다.
창밖에는 빈손으로 와있는 달빛에 귀뚜라미 노래 들려준다. 꽃으로 떠나는 것은 사랑이다. 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떠나는 이의 마음속에 향기를 남기고, 사랑은 열매를 맺는다.
모든 사랑은 산을 넘어와 나뭇잎에 붉고 붉은 지문을 남긴다.
잃은 것과 가진 것은 무엇일까.
뭐일까? 열매들의 가을걷이 노래 부른다. 닫아놓은 내 맘의 문을 활짝 열면 푸름 속에도 눈물 가득 고인 가을 아침.
이제 할 수 있는 한 멀리, 멀리 올라 잠들리라. 다시 할 수만 있다면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리라.
내가 그대와 마주 앉아 그대 이름을 부를 때 그대는 푸른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으로 그대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지난여름의 뜨거운 눈빛이 내게 닿을 때, 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시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그대의 푸른 정맥은, 낮게 또 멀리 흐르는 강물이었다. 그대의 강은 둑이 없었다. 그대의 가슴은 굽이치는 물풀이 우거져 새들이 퍼덕거렸다. 느리게 다가오는 강은 강가에 앉은 나의 몸속을 지나 흘렀다. 저녁이면 노을이 풀리는 강물은 빛났고, 강물이 실어오는 노을과 어둠이 몸속으로 스몄다. 당신의 겨드랑이 속으로 사라지는 당신의 정맥이 저녁 무렵의 강물처럼 닥쳐올 시간의 빛깔들을 실어서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기를 나는 그 강가에서 꿈꾸었다.
바다의 기별은 그렇게 일렁이는 뜨거운 노을처럼 내 허리께로 밀려들었다.
내 빈곤한 사랑은 그 여름에 그렇게 뜨거웠다. 사랑의 메모장은 늘 그대의 담장을 넘어서는 장미의 줄기처럼 뻗어만 갔다. 그대의 미소는 ’관능‘이었다. 맨발로 해변을 걷는 것은 지울 수 없는 한 장의 에로틱한 흑백 사진이었다. 아마도 닿아지지 않는 관능의 슬픔으로 그 글자들을 지우는 것은 물새들이었다.
나의 관능과 그대의 관능 사이의 거리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름의 뜨거운 입술이었다. 그래, 가을은 모든 사랑의 결핍이고 상실이 맞다.
삶이 존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순리이듯, 떠나는 것은 나를 찾아온 시간보다 더 아픈 물의 정거장이었을 것이다. 사랑과 삶은 늘 순조롭지 않다. 떠나는 것들은 늘 순교를 한다. 누가 떠나는 이의 등 뒤에서 반역자라 하는가. 이것은 순백의 사랑을 위한 결심이다.
떠나는 사랑은 빛의 가운데로 걸어간다. 어떤 침울한 표정도 허락하지 않는다. 의식이 파고드는 시간까지 깊이 파고드는 깊은 사랑은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침몰하지 않으려 해도, 눈을 부릅뜨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해도 무서운 붉은 바람을 잡아맬 수 없다. 그래, 차라리 창을 열자. 후끈한 바람이 지나가면 아주, 멀리 새로운 길이 열릴 거다.
어둠은 끝에서 물결쳐 올라온다.
밤바다는 그렇게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것이다. 저 맑고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대를 생각한다. 지난여름 우리는 이곳에 앉아 하염없이 흘러가는 저 호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이별 여행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저 말없이 저 먼 곳만 바라보았다.
영원히 외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은 법정 스님의 말이었다.
스님은 칠흑처럼 어두운 숲에서 말소리를 들었다 했다. 푸름의 말이었다. 또다시 외롭지 않고 혼자일 수 없는 것은 돌아서는 것이다.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떠나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제 돌아서는 것이다. 산과 계곡을 찾아다니며 탄성을 지르는 것도 찰나였다는 사실이다.
떠나는 계절은 반드시 계절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외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계절의 열병을 이해하는 것은 자유로운 날개를 달고 저 먼 창공으로 날아갈 수 있게 놓아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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