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기까지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3월 06일(일) 16:55 가+가-

우리는 다양한 매체에서 여러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것을 수없이 접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인간극장》과 같이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를 보면서 안타까움에 공감하고 약자에게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한다.
하지만 실체감 없는 경험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2019년 늦가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갔다. 저녁을 간단하게 때우고 지하철을 타게 됐다. 노약자석에 앉은 대학생쯤 돼 보이는 사내를 보게 되었는데, 사지 멀쩡하고 외관이 깔끔한 것이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쑥덕대었는데, 그 옆에 앉아있던 할아버지 두 분이 “목발 짚은 아주머니가 코앞에 서있는데 비키지도 않고 무엇하느냐”며 가정교육 잘못한 부모를 욕하는 것이었다. 광화문역 인근에서 그 아주머니가 좌석 옆에 목발을 대어놓고는 사내에게 손을 뻗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나 지켜봤더니, 아주머니가 사내를 일으키며 양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워 넣어주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남루한 행색의 아주머니와 잘 차려입은 사내, 그리고 부축하고 돌보는 아주머니와 돌봄 받는 사내. 처음부터 이 장면을 보았다면 바로 이해했을 것을. 혹은 화면 너머로 보았다면 침착하게 유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 아주머니와 사내가 어떤 사연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상황을 겪고 나니 평소 비판적이고 시니컬하게 글을 쓰고 말을 꺼내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말의 품격’에 대해서 긴 글을 썼던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말로만 백점이었던 것이다.
나는 SNS를 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SNS는 우물과 같다고 말했다. 비슷한 관심사에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보듬고 오구오구하기 쉬운 형태의 소통방식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우리는 옳다’는 집단최면에 빠져서 자칫 객관성을 잃고 폭주하기 쉽다는 점에 대한 경계였다. 그런데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다독(多讀)에서 비롯되는 깊은 간접경험에도 마찬가지의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간접경험은 실체감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직접 그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대로 감정을 따라가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가 의도한 감정을 내 감정과 판단인 양 앵무새처럼 따라 읊으면서 가볍게 소모하곤 간접경험을 알차게 했다고 으스댄 꼴이다.
나는 맥주 작은 캔 하나면 적당히 기분이 좋아지고 다음 날 견딜 만한 정도의 숙취를 앓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마셔야 이성이 통제를 잃고, 내 술버릇이 무엇인지는 취할 정도로 마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사실 큰 캔 하나 정도를 마시면 얼굴이 며칠 내내 새빨개지기 때문에 일부러 자제한 탓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너무나 기분이 좋은 나머지 주면 주는 대로 마시고 또 준 대로 부어주며 마시다 보니 다섯 마리의 개가 하마터면 홍대에서 얼어 죽을 뻔했다.
이튿날 10시쯤 서로 눈을 떴는데 노래방을 나선 것은 어렴풋이 기억하면서 누가 어떻게 숙소까지 이끌고 왔는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가닥가닥 끊긴 기억들 사이로 내가 앞장서서 소리치고 고압적으로 지시하듯 이끈 것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 술버릇이 리더처럼 나서서 행동하려고 드는 것인가 보다. 핸드폰에 찍힌 술값과 택시요금을 보니 숙소로 이끈 것도 나인가보다.
여러 매체에서 술에 취한 사내들이 휘청대며 도심을 배회하는 꼴을 묘사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는데 내가 저러고 말았다. 직접 경험하고 나니 그들이 왜 그랬는지 잘 알 것 같다.
때로는 이성이 분위기에 지고 감성에 휘둘려서 같이 폭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이라는 반가움과 떠들썩하게 떠들고 노래하던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리움, 그 때는 손도 못 대던 술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는 미묘한 배덕감이 더욱 취하기 쉽게 만들었으리라.
어떤 어려운 일도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단 한번 해보고 나면 자신감이 팍팍 붙는다. 경험이 중요한 이유이다. 나는 전자제품을 사면 일단 설명서를 정독하는데, 떠올려보면 설명서를 읽더라도 한 번 전자제품을 다뤄봐야 설명서를 읽은 내용이 깊이 이해가 되어 내 것이 된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 같다.
간접경험은 체험에 앞선 설명서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이번 한 번의 서울행에서 깨달았다. 이 또한 여러 번 책에서 봤던 이야기이지만 직접 경험하면서 설명서의 내용을 떠올리고서야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 어설프고 섣불렀던 나를 후회하면서 다시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