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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의 절규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2월 13일(일) 16:50 가+가-
어린 시절 PC통신을 너무 오래 사용해서 부모님께 혼났던 적이 몇 번 있다. 게임을 하고 소설을 보기 위해서 통신망에 접속할 때 반드시 듣게 되는 멜로디에는 묘한 기대와 흥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들을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듣게 되었다. 팩스를 보낼 때마다 어릴 적 듣던 그 소리 그대로 연결을 알리고 있는데, 망이 좋지 않은지 간혹 먹통이 되어서, 팩스가 잘 가는지 귀로 감시하게 되었다.
2020년 여름, 사무실의 팩스가 결국 사달을 냈다. 계속 통신 오류가 나서 보내는 데 한세월이 걸리고, 제대로 들어오는 팩스도 몇 통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팩스기 판매사는 통신사 탓을 하고 통신사는 팩스기 탓을 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신호가 잘 안 잡혀서 한 통 보내는데 5분 넘게 삐-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약간은 두통이 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원인 없는 결과라니.
집에 와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찢어지게 울리는 것이 꼭 제대로 가지 않아 수십 번을 보내야 하는 팩스 소리 같았다. 듣고 있자니 참 간절하게 들렸다. 저들도 일가친척이 어떻게 지내나 짝은 어찌 지내나 안부를 알리느라 절박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사무실 팩스처럼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20년 추석은 유난히도 황량했다. 그 전년도만 해도 복작대던 집안에 휑하고 오직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작은집 가족도 안 왔고 고모네 가족도 안 왔다. 서울의 동생들은 보름 일찍 집에 다녀갔다. 할머니도 코로나19로 요양병원에서 나오지 못하셨다. 그래서 요양병원 창밖 너머로 손주들이 할머니께 손을 흔들어 잘 있다고 안심시켜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집 가까이 있는 큰외숙모께 다녀오는 길도 한산하기가 평일 퇴근시간보다도 운전하기 쾌적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가까운 추석연휴가 너무도 길었다. 모처럼의 휴일임에도 몸살 난 듯이 욱신거려 툭하면 드러누워 있었다. 코로나19가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추석이 지나고 둘러본 시내에는 문 닫은 카페가 많았다. 식당거리의 식당들도 다 문을 닫은 가운데 아예 방을 뺀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굶주리다 못해 달걀을 훔친 40대가 1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도 들려왔다. 전염병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으니 사회가 점점 더 팍팍해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어색한 자리에서, 마찰 없이 부드럽게 상황을 진행하기 위해서 건강이나 날씨, 고향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건강을 이야기하려면 상대가 혹시 채식주의자는 아닌가, 채식주의자에게 비호감을 가진 것은 아닌가 염려되고, 날씨를 이야기하다가는 정부의 미세먼지 대책 혹은 중국에 대한 입장차로 더욱 껄끄러운 상황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든다. 고향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더라도 도시화 되어가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 시골에서 자란 사람 간에 서로 공감하고 대화를 진행하기가 참 어렵다.
다극화 세계라더니 양극에 선 사람끼리 만나게 되는 경우도 흔하고, 어떤 사안에서는 양극점이면서도 또 다른 사안에서는 같은 극에 서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극이 많은 것 같다. 다극화라기보다는 수많은 분야에서 끊임없이 양극화가 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런 까닭에 신문을 봐도 TV를 봐도 인터넷을 봐도 싸우는 사람들 밖에 안 보인다.
내 삶이 팍팍하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숨은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끝없이 의심하고 적대하는 겁에 질린 귀뚜라미들이 되어버렸다. 공포 때문에 침입자를 끝내 시체마저 찢어버리는 귀뚜라미 싸움터가 되어버린 것 같다.
소설, 뮤지컬, 영화 등 여러 형태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을 탐독하며 장발장이라는 인물에 여러 차례 깊게 감동했다. 미리엘 주교를 만나기 전의 장발장은 더이상 떨어질 곳도, 올라갈 곳도 없다는 절망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회 밑바닥의 밑바닥에서 분노와 증오만으로 가득 찼을 때, 지친 그의 영혼을 품어준 미리엘 주교의 인품. 그리고 주교의 자비와 인류애를 통해 회개한 장발장의 끝없는 사랑의 삶. 미리엘 주교를 만난 이후의 장발장은 ‘이런 나라도 신실하고 사랑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화신으로 느껴졌다.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좌우의 두 강도가 한 사람으로 묘사된 듯한 인상이었다.
귀뚜라미는 짝을 만날 수 있을지, 오늘 같이 괜찮은 내일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다. 때문에 제대로 보내지지 않는 사무실의 팩스와 같이 끝없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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