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1년 11월 21일(일) 16:41 가+가-

우리 형제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성인이 되어 회상해보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부모님이나 자주 집을 찾는 친척 어른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 다였다.
할아버지께서 6·25참전용사라는 것도 6·25참전용사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밟는 와중에야 알게 되었고 여순사건에 작은할아버지께서 연루된 탓에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경찰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할아버지께서 폐기종이 심해지셔서 거동이 힘들어지셨을 때에서야 듣게 되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는 원래 할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원래 아버지인 줄 알았다. 아니,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큰외삼촌께서 돌아가시고 몇 년간 밤잠을 설쳤다. 또 잠든 사이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가 있었다. 새벽녘 한두 번씩 할머니와 막내동생이 잠든 방을 슬쩍 둘러보다 가슴께의 들썩임이 안보이면 또 철렁해서 다가가 앉아 숨소리를 듣고 나온 적도 몇 번 있다. 그러다 깨달았다.
원래 이렇게 작으셨나? 내가 어릴 때는 허리가 꼿꼿하셨는데 언제 기역자로 굽으셨지? 만연산 아래 밭에도 한달음에 오르시던 분이 집 앞에 나서는데도 이리 숨차하시게 된게 언제부터지?
우리 형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랐으면서도 무릎베개를 하고서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든 경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할머니께서는 콩고물과 약간의 소금, 약간의 설탕에 밥을 비벼서 주시곤 했다. 이른바 얼마 전 유행했던 달고 짠 맛이 조화되는 단짠간식을 90년대에 이미 해주셨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말수가 적으셨다. 굳이 흰소리를 하고 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셨는데, 우리가 동네 친구들과 뛰놀고 있으면 저 멀리 산자락에서 늘 농기구를 손에 쥐고 산에 오르셨다. 그러면서도 나나 동생들이 어렸을 때 매일 아침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시간에는 데려가셨는데, 내 주먹을 날계란 쥐듯이 조심스레 감싸는 바위같이 크고 단단한 손의 따뜻함이 말이 필요 없는 마음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부잡해서 유리에 무릎이 크게 찢어지고 이용실 면도칼에 손등이 벌어진 큰손자를 업고서 한달음에 읍내의 병원까지 뛰어가셨던 마음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지만 폐기종으로 거동이 힘드시면서도 날 볼 때마다 왼 손등을 맞잡고 크게 진 흉을 만지작하시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할아버지께는 내가 다쳤던 것을 지우지 못하는 후회였던 것 같아 죄송스럽다.
우리 형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옛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드리고 있다. 시골집의 개들이 강아지를 몇 마리 낳았고 오늘 점심은 뭘 먹었고 시내에 나가서 뭘 했는지. 나는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뉴스를 보면서 남의 경험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나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할머니께는 우리의 이야기가 책이고 다큐멘터리고 뉴스나 마찬가지이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반갑고 궁금하고 속편을 바라는 책이고 다큐멘터리이고 뉴스이지 않을까 싶다.
유튜브에는 수많은 종류와 장르의 영상이 매분매초 올라오고 있다. 그 수많은 종류와 장르의 주류 중에는 동물영상이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새끼를 살리려고 인간에게 다가오는 동물이라는 소재의 영상이 심심찮게 보인다. 여전히 주류 중의 주류는 집에서 키우는 소동물들의 귀엽고 재미있는 장면과 상황이지만, 부모의 심정에 공감할법한 영상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요즘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서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한두살 많은 동네 형, 한두살 적은 동네 꼬마가 어울려서 골목에서 공을 차고 개울에서 붕어를 잡고 논두렁 옆 실개천에서 올챙이를 잡았다. 돌이 있으면 땅따먹기를 하고 나무막대가 있으면 자치기를 했다. 그러다 해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울 쯤 골목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찾는 엄마와 할머니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면 흙먼지로 더러워진 손으로 밥하다 나온 손을 마주잡고 집에 들어가 등짝을 맞으며 세수당하고 코를 풀고 손발을 씻었다.
한 상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오늘 배웠던 것, 놀았던 것, 가봤던 곳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