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행이 온다
최창일 시인.문화이미지심리학자
작성 : 2021년 11월 02일(화) 16:41 가+가-

눈으로 듣고 가슴으로 뛰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었다. 여행은 뜻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 전단을 뿌리다가 독일로 망명을 한 이미륵 소설가의 경우다. 한국문인협회와 C시인은 2008년 5월 이미륵 소설가의 독일 시간을 만져보는 여행의 시간을 가졌다.
한국문인협회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모국어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에게 격려와 수상의 시간도 동시에 가졌다.
해외 문학상의 17회 수상자는 독일에 거주하는 강유일(55세 당시) 작가다. 수상작은 ‘피아노 소나타 1987’ (민음사 펴냄) 였다.
강유일 소설가는 당시 라이프치히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문인협회는 독일의 문인들과 대화 시간도 만들었다.
행사를 마친 협회는 해외 문인들과의 정겨운 시간을 뒤로하고 이미륵이 묻힌 그래펠핑공원묘지로 향했다.
이미륵 교수는 쫓기는 여행자를 넘어 한국 최초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압록강을 흐른다>의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은 독일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이미륵은 1899년 황해도에서 출생, 1950년 5월 20일 독일에 영면한 작가다.
청년 이미륵은 일경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안중근 의사의 조카 봉준 씨의 소개로 마르세유를 거처 1920년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하 분도회 수도원에 안착한다. 그를 태워다 준 배는 프랑스 여객선 ‘Le Paul Lecat’였다.
사람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운명은 달라진다는 말을 이미륵을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미륵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다. 1928년 뮌헨대학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미륵은 사진 촬영에도 일가견이 있어 독일의 신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사진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미륵은 그가 전공한 동물 의학을 뒤로하고 낯선 동양의 문화를 전파에 힘을 쏟는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강사로 재직하며 한학 및 한국학 분야 강의를 한다.
이미륵은 지금으로 보면 젊은 나이 51세로 생을 마친다. 그가 묘지에 묻히던 날, 독일 친구들은 이미륵 박사가 평소 들려준 한국말로 애국가를 불러주었다.
타국에서 죽음이었지만 3백여 명의 조문객이 모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가 처음 묻힌 곳은 눈이 녹지 않는 공원묘지 외곽의 외진 곳이었다.
그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던 송준근 옹에 의하면 한국 정부와 교포가 뜻을 모아 공원의 정원이 널찍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으로 1995년 이장을 했다. 독일인이 묻히는 평수보다 세배의 크기로 묘소를 만들었다. 우리를 안내한 송준근 옹의 나이는 60여세로 보였다. 그에게 나이를 묻지 않고 하는 일을 묻지 않는 것이 지금은 후회다.
우리 일행이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이미륵의 독일 여자 친구 에파 크라프트(Eva Kraft)는 94세의 나이었다.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평소 그는 한국인의 방문이 있으면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 한다. 마치 이미륵 박사를 대하듯 했다. 후일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의 기록, 정규화 저서에서는 그가 제자이며 애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송중근 옹은 애인이라는 말에 정색한다.
이미륵 박사를 존경하는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추측에 이미륵 박사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익힌다.
이미륵이 독일에서 얼마나 인격자로 살았는지에 관한 일화가 있다. 전후 독일경제 사정은 한국의 50년대와 같았다. 시민들은 배급을 받아서 생활한다. 이미륵도 예외가 아니다. 하루는 그가 받는 보급 표에 한 장이 더 딸려 들어왔다.
이미륵은 주저 없이 반환한다.
이런 이 박사를 두고 신문은 미담으로 소개한다. 가짜 보급 표까지 나돌던 궁핍한 시기에 조선의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망명의 여행객 이미륵은 조국에서 이미 결혼한 처지였다. 쫓기는 여행자, 이미륵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홀로 생을 마감한다.
조국을 떠나기 전 아들을 낳았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은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 없다. 그가 남긴 40여 편의 소설은 독일인에게 ‘코리아’를 올바르게 인식시켰다.
그는 우리 민족과 문화를 어느 외교관보다도, 어떤 선전보다도 더 마음속 깊이 넣어준 여행 망명가라고 볼 수 있다. 고인은 아직도 그래펠핑 묘지에 영면하고 있다.
묘지 관리비는 그의 친지들이 내주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륵박사 기념사업회가 발족되기도 했다.
독일 문화협회는 이미륵의 묘지관리를 영구히 독일 시가 맞기로 했다는 후일의 소식이다. 독일인들은 이미륵을 보면서 동양, 특히 한국 사람은 모두가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사연 많게 살아온 이미륵의 사후 인격도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미륵이 위암으로 죽음을 앞둔 시간에는 독일인 여자 친구 에파 크라프트가 돌봐주었다. 그 또한 이미륵의 인품을 한없이 존경했다고 한다.
이미륵이 생을 마감하기 5년 전 한국은 해방하였지만 이미륵은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먼 이국의 망명 시간을 마쳤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뜨거운 시절이 있다. 이미륵의 뜨거운 시절은 우리에게 많은 느낌을 주고 있다.
“독일에 가거든 이미륵 소설가를 만나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