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를 감히 누구와 비교합니까? 비교는 되던가요?
이창용 前 순천대학교 외래교수
작성 : 2021년 08월 23일(월) 16:45 가+가-

제국주의 일본 통감이며 우리나라 침략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처단 함으로서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던 안중근 의사와, 최근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부인의 남편인 모 인사를 비교한 발언을 한 대선 후보가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필자는 전 재산과 몸과 혼을 바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짧은 생애를 불태웠던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시신을 고국에 모시지 못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죄송하고 송구스러운데, 사법과정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2심 판결을 놓고 독립투사인 안중근 의사와 비교한 발언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청사에 길이 남을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독립 운동가였고, 한국인의 혼을 담아내어 거룩한 분노를 세상에 외친 선각자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살펴서 그분의 가족들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 애국 애족의 철학과 역사인식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부모는 안태훈과 조 마리아이다.
안태훈의 본관은 순흥으로 본래 해주부의 향리가문이었으나 무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망 있는 무반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안태훈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에 의해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평소부터 개신교나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1896년 가을 명동성당을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그 후 안중근과 안중근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형제, 아들, 조카들과 함께 아내, 누이동생들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조 마리아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 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실로 조 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대한 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1905년 가을 안중근은 중국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상해로 이동했으며, 안태훈은 남은 가족과 함께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안중근의 귀국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안태훈이 지병으로 서거함으로 조 마리아는 아들들을 따라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06년 봄, 진남포로 돌아온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 극에 달한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 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국채 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는 가운데 안중근은 자신의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국채 보상금으로 헌물 하였고, 1907년 5월에는 동생 정근과 공근도 형의 뜻을 받들어 삼흥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34원의 국채 보상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아들이 국채 보상운동에 매진하고 있을 때 모친 조마리아도 이에 적극 동참했다. 감히 누구를 안중근의 가족들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1907년 7월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 학교 교장을 사직하고 모친인 조 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때 조 마리아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라는 천금 같은 격려를 해주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황성신문〉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10분 만에 절명하였으며 오후 1시 뤼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보도했다. 집행 며칠 전 동생들에게 “독립 전에는 시신을 옮기지 마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들려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광복 후 남북한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무덤 자리를 찾지 못해 유해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와 그분의 부모 형제자매가 모든 재산과, 몸과, 마음을, 나라 독립을 위해 고스란히 바친 영웅들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한다. 하얼빈 역에서의 담대한 행동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거룩한 영혼의 분노였음을 생각하며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엊그제 8월 15일에는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었던 홍범도 장군께서 공군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고국으로 돌아오시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보면서, 안중근 의사의 시신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찾아 고국으로 모시는 사업을 중단 없이 추진하여 겨레의 영원한 국부로 모셔야 한다고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