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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는 한국 여행계획을 세웠다
최창일 시인·문화이미지심리학자
작성 : 2020년 07월 28일(화) 16:46 가+가-

세기의 로맨티스트 카사노바(kasanova1725~1798)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바람둥이로 손꼽는다.
하지만 카사노바에 대한 인간적 흔적이 과장되거나 잘못 알려진 부분들도 있다. 카사노바는 생전에 여행을 즐겼고 시를 쓰고 사랑하며 동양, 특히 한국에 대한 동경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진다.
한국을 다녀온 성직자가 한 폭의 그림을 카사노바에게 선물했다. 그림 속에는 한국의 선비가 ‘갓’(관리가 쓰는 모자)을 쓰고 거리를 걷는 것이 호기스럽고 이채로웠다. 카사노바는 언젠가 여행을 통하여 한국의 갓을 쓰고 의관을 직접 체험하여보고 싶었다. 그가 남긴 22권의 회고록과 40권의 저서는 연애지상주의자라든가 성적 쾌락주의자라고 폄훼, 무리한 해석들이 분분하다. 그가 남긴 회고록은 18세기, 200년 전의 베네치아와 로마, 프랑스의 문화적인 형태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카사노바는 유럽의 모든 도시의 곳곳을 탐험하듯 여행하였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진심을 가지고 사랑했던 여자들의 심리, 가정 배경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복식 학자나 당시의 문화 연구자에게 크게 도움이 되며, 여러 자료로 활용 되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유홍준 교수의 ‘우리문화유산 답사기’와 같다.
카사노바는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1725년4월2일에 태어났다. 당시 베니스는 예술과 정치, 음모가 화려하게 꽃피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카사노바의 부모는 무명배우다. 유럽무대를 누비는 부모는 카사노바를 외할머니에게 맞기고 유럽의 곳곳을 순회 하였다.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카사노바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결핍이 있었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아버지마저 일찍 사망하게 된 카사노바는 9살에 학교의 기숙사에서 보내진다. 카사노바는 외로운 시간을 엄청난 독서로 지식을 쌓는다. 이 당시 쌓은 지식은 평생 동안 밑천이 되고 많은 저서를 남기는 동력이 되었다. 카사노바에게는 여섯 형제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여동생은 미술에 두각을 보여 당시 유명화가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카사노바 가족들의 유전인자는 우수한 것으로 보인다. 카사노바의 키는 2미터가 될 정도로 거인인데다가 수려한 외모를 가졌다. 파도바대학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며 학업을 닦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탁월한 언어 능력이 있어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 했다.
더구나 대학에서 학습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였음은 물론 신학, 법학,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엘리트들과 교류하는 밑거름을 갖추었다. 특히 그는 상류 사회가 소통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도 귀족 가문의 어느 기사보다 특출함을 보였다.
카사노바는 대중이 만든 풍문과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흥미로운 소문과는 다르다. 그의 회고록에서 스스로가 밝힌 교제의 여자는 122명이다. 세간의 소문은 900명이다, 1000여명이라는 과장도 섞여 있다. 카사노바는 성장 과정이 말해주듯 사회적인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 컸다. 당시는 군인이 되거나 성직자가 되는 것이 출세의 길이었다.
카사노바는 성직자를 택했다. 그는 자신이 평소 존경하고 잘 알고 지내던 알비세 말리피에로의 도움으로 1740년 열 일곱의 나이에 사제 수업을 마치고 성직에 입문한다. 베네치아의 코레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는다.
그는 스페인 주재 교황청 대사인 아쿠아비바 추기경의 비서실장을 지내며 아주 짧은 기간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대주고 말리피에로가 영일곱살인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카사노바에게 몽레알 백작부인의 관리인 딸인 루시아를 알게 되고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사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랑과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훗날 그녀가 호색한에게 농락당한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다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자신과는 사제의 길이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파도바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비록 박사학위는 받았으나 카사노바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소극장의 초라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다. 위기는 기회를 가져온다고 했다는 말이 카사노바에게도 주어졌다. 연주를 마치고 곤돌라에 올랐는데 때마침 베니스의 시의원이던 브라가딘 경이 뇌졸중을 일으켰다. 카사노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브라가딘경을 집으로 옮기고 간호했다. 브라가딘 경이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여 치료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너무 뻔뻔한 카사노바의 말을 믿고 브라가딘 경은 카사노바를 양자로 입적하고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지는 기회를 주었다.
그 같은 기회는 시인, 요리사, 법학자, 군인의 경력을 가진 천재의 카사노바에게 수많은 상류사회의 여성들과의 교제를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카사노바는 예술과 감각의 세계를 사랑한 18세기 세기의 인물이다. “나는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평생 모든 일을 행하면서 내가 늘 자유로웠다”는 말을 남기며 70세의 생을 살았다. 그는 보헤미아의 둑스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자서전 <나의 인생이야기>를 쓰면서 1798년 6월4일 둑스에서 눈을 감는다. 그는 꿈꾸었던 한국 여행계획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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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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