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6·25 동란 정전협정일 67주년을 맞았다. 이날에 대한 명칭도 남한에서는 정전협정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전승절이라고 부른다.
여기 시 한편을 소개한다.
늙지 마시라. / 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 세월아, 가지 말라 / 통일되어 /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 이 가슴이 아픈데 / 세월아, 섰거라 / 통일되어 /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 나에게 다오 / 내 어머니 몫까지 /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 검은빛 한 오리 없이 / 내 백발 서둘러 온대도 / 어린 날의 그때처럼 /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 그다음엔 / 그다음엔 / 내 죽어도 유한이 없으리니 / 어머니 찾아가는 통일의 그 갈에선 / 가시밭에 피 흘러도 아프지 않으리 /어머니여 / 더 늙지 마시라. / 세월아, 가지 말라 / 통일되어 / 우리 서로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 이 시는 북한의 유명한 고 오영재 시인이 남한에 생존해 계시던 어머니께 헤어진 지 40년 만에 보낸 해외교포를 통해 전해 온 사모곡이다.
오영재 시인은 1935년 11월17일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여 함평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강진과 함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1950년 열여섯 살 때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대에 강제로 입대하게 되었고 당시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슬하에서 함께 태어난 7남매의 둘째였다.
오영재가 인민군대에 입대하자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 두 달이면 전쟁이 끝나고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서의 공부를 계속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둘째아들 영재가 장흥군의 대화국민학교에서 의용군 훈련을 받고 있을 때 한 살짜리 어머니는 막내 동생 영숙이를 등에 업고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칠 십리 길을 8월의 폭염 아래 병약한 몸을 이끌고 온종일 걸어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훈련소의 정문에 도착했다.
단 몇 분밖에 허락되지 않은 면회시간에 “성한 너의 얼굴을 보니 이젠 마음이 놓이고 잠이 올 것 같다.”는 짧은 말씀만 남기시고 선 채로 뒤돌아서서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먼지 낀 신작로로 사라져가는 어머니의 흰 저고리를 학교 마당가 한 그루 은행나무 밑에서 바라보던 영재는 소리 없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생이별을 하고 헤어져 서로 간에 생사를 모른 채 살아 온 40년 세월동안 문득 문득 생각나는 어머니의 모습에 영재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 마음을 술과 담배로 마음을 달래며 해마다 새해 아침이 되면 자식들과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는 남쪽하늘을 향해 세배를 함께 드리며 살아왔다.
오영재 시인은 인민군대에서 제대한 후 1960년 평양 작가학원을 졸업 조선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기자 겸 시인으로 활동했고 1964년 혁명대작 작업으로 최영화와 함께 백두산을 답사하고 1995년 노동영웅상 및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2000년 8월15일 제1회 남북이산가족상봉으로 서울을 방문 『행복한 땅에서』,『철의 서사시』,『대동강』,『인민의 아들』외 수십 편의 작품을 집필한바 있는 북한의 저명한 시인이다.
오영재 시인은 1990년 8월4일자 《한겨레》신문의 사회면을 통해 6·25때 실종된 오영재 시인이 현재 북한에 살아있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범민족대회에서 만난 북의 문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이 기사는 미주민족문화예술인협회 회장이며 자유기고가인 김영희 회장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기사로 국내외에 최초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또한 《통일예술》창간호에 오영재시인의 작품을 실었고 그 책이 남한에 있던 가족들에게 전해져 청천벽력 같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한에 살고 있던 가족들의 근황과 이야기를 북한에 살고 있던 오영재 시인이 알게 되면서 꿈에도 잊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가 바로 늙지 마시라 였는데 어머니는 그만 1995년4월에 오영재 시인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를 뵙고자 북한에서 제1차 이산가족상봉단의 일원이 되어 가족과 헤어진 지 50년 만에 서울로 달려온 오영재시인은 끝내 어머니의 묘소마저 가보지도 못한 채 북한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0년 6월25일 여의도 침례교회의 음악목사인 이요한(Jim Ailor)목사가 오영재시인의 시 ‘늙지 마시라’ 에 맞춰 「6.25 기념 50주년을 맞아 한국 진혼곡」을 공연하게 되었다.
그 후 오영재시인도 2011년10월23일 갑상선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1천만 명에 가까은 남북이산가족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그리며 피눈물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기다리는 이들의 소원은 커다란 의미의 통일이 아니라 상호 왕래하고 연락을 자유롭게 취하기만 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오영재시인의 형은 소설가 오승재 작가로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진 소설가로 한남대학교에서 정년은퇴를 했다.
정전협정일 67주년과 광복 75주년을 맞아 다시 상기하는 「한국진혼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