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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최초의 대장 백선엽 장군

김철수 아동문학가·美솔로몬대학교 한국학장
작성 : 2020년 07월 19일(일) 16:54 가+가-

지난 15일, 6·25사변의 전쟁영웅인 백선엽 전 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갖고 국립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백 장군은 1920년 11월23일 평안남도 강서면 덕흥리 출생으로 어린 시절은 평양에서 보냈다.
그는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한 때 교직에 몸을 담기도 했다.
그러나 군인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1941년 만주국 봉천에 있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 제9기로 졸업을 했다.
그리고 곧 바로 자무쓰부대에 배속되었고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출을 받아 3년 정도 근무하기도 했다.
그런데 백 장군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에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이력을 가지고 논한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만주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 군대인데 이에 대해 고 백선엽 장군은 지난 2009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힌바 있다.
“나는 독립군을 구경조차 해 본적이 없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라며 자신은 독립군을 토벌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고 백선엽 장군이 간도 토벌대에 근무하기 전에 이미 일본의 대대적인 만주에 대한 사전토벌로 한국인 독립군은 이미 소멸되었거나 존립했더라도 팔로군 휘하의 공산군으로 편입되어 6·25전쟁의 남한 침공의 선봉대가 되었었기에 사실상 백선엽 장군에 의해 피해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한국계 독립군 세력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절대적이다.
백 장군이 생전에 살아있을 때 자신이 죽으면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해달라고 했다는데 그가 국군에 입대하기 전에 어찌했던 일본군에 복무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백 장군의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지난 7월 10일 오후 11시35분에 100세의 노장은 서울대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백 장군의 장례는 육군장으로 5일 동안 치러졌으며 백 장군의 친일 이력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나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된 것만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미국의 국무부에서도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전해 온 장례식에 국군의 통수권자인 대한민국 현직대통령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비단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되물어본다.
백 장군이 직접 겪은 실화가운데 치열한 낙동강 전투현장에서 전의를 상실한 국군병사들이 무단이탈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지금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미군들이 이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우리기 이럴 수는 없다며 “내가 앞장 설 테니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만약 내가 먼저 후퇴하면 나를 총으로 쏴도 좋다.”고 호소를 했다.
모든 지휘관들이 대부분 부하들에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마당에 “나를 따르라.”는 백 장군의 단호하고도 결의에 찬 명령에 국군장병들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전투에 임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 장군이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 여·순 반란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공산게릴라의 소탕과 주동자의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49년 2월 군 병력제공 죄로 사형을 구형 받은 뒤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백선엽 정보국장은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직접 면담한 후 만주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라는 보증서를 제출토록 하여 무죄석방을 시켜줬다.
그 후 불명예로 제대한 박정희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으로 북한반 상황실장을 맡아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정보국에서는 예산문제로 박정희의 문관 월급을 보장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 국장은 자신의 판공비 가운데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고 1953년 박정희를 장군으로 만들어 준 것도 백선엽 장군이었다.
당시 경무대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아 장군 승진에서 재외 시키려 했으나 백선엽 장군은 확신을 갖고 강행했다.
백선엽은 6·25가 발발하던 해인 1950년 4월 당시 대령계급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지역을 담당하고 있다가 2개월 뒤 6·25 전쟁을 맡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최초로 육군대장의 자리에 올랐고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의장을 맡았으며 휴전회담 한국대표로 참여했다.
예편 후에는 주·중 대사와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국군창군의 원로이자 6·25전쟁 영웅이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힌 지 하루 만에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는 고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을 보며 혼란스럽고 황당하기 그지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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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h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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