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한번 이 나라 민주주의의 대모로 불리울 이희호 여사를 추모한다.
한 여인이 한 나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바꾸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고 건너지 못할 강의 다리가 되었다.
자신만의 무사안일한 평안보다는 한 남ㅍㄴ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생애를 바쳤다.
지난 10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희호 여사는 국민에 대한 감사인사와 민족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하셨다.
1922년 개화기에 태어나 스스로 여성지도자로서 여성지도자를 양성하며 여성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다.
DJ와 함께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한 가시밭길을 동행하며 파란만장했던 여사의 삶은 여성, 그리고 나라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이었다.
당시 신여성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YWCA총무로서 여성운동을 이끌던 그는 독신주의를 털고 40세 노처녀로서 홀아비에 상처 후 두 아들과 셋방살이를 하던 무일푼 무직자 김대중과 결혼, 가족과 주위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희호 여사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 결혼을 반대했다.
1세대 여성운동가로 스스로 조명 받을 수 있는 순탄한 삶 대신 김대중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에 뛰어든 것이다.
구속과 가택연금, 혹독한 정치 탄압을 함께 받았다.
언젠가 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적 탄압과 감당키 어려운 고문 속에 민주화 의지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으나 꿋꿋이 자신에게 ‘당당하라’ 당부하며 고난을 감당할 것을 격려하는 부인에게 변절자로 낙인 찍힐까바 의지를 더욱 굳혔다”고 토로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고 북한과도 평화의 물꼬를 튼, 그리고 복지정책의 근간을 이룬 김대중 곁에는 언제나 이희호 여사가 있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14일 영결식 조사를 통해 ‘이제 정치적 탄압도 고문도 가택연금도 없는 그곳에서 편안히 쉬시라’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경천 YWCA 역대 이사회 회장은 이희호 여사를 “여성지도자의 선배, 인권, 민주, 평화, 자유의 선배, 김대중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라 평했다.
이어서 당시 신세대 여성교육을 받고 미국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운동가가 두 아들을 둔 홀아비 고졸 출신 김대중과 결혼을 가족도 주변도 극구 반대했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낭인이나 다름없던 김대중을 장래 위대한 정치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도 “김대중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평가하며 페이스북을 통해 “저는 늘 김대중은 이희호로부터 태어났다고 믿는다”며 “언제나 대통령님과 여사님은 함께 계셨지만 어떤 경우에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 절제가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이희호 여사는 47년간 김대중 대통령과 고락을 함께 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절 가택연금과 납치, 투옥, 사형선고, 해외망명등 DJ가 생사를 드나드는 위기때마다 그의 곁을 지키는 버팀목이었고 동지였다.
회고컨대 1976년 ‘3·1 민주구국 선언 사건’ 이후 옥살이는 반복되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주동자로 조작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회유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남편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