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박물관 정원에는 350년 된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정원수로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다. 일곱 그루나 된다. 이 향나무들은 각기 다른 종들이다.
그들은 나무의 품격을 유감없이 보인다. 어느 누가 와도 그가 꿈꾸는 사계는 벗어 날 수 없다. 사람이나 나무도 각기 카리스마라는 것이 존재한다. 구지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풍기는 면모라는 것을 이른다. 우리는 이것을 유식하게는 이미지라고도 한다.
박물관 정원의 향나무는 그러한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눈에는 오래된 정원의 정숙함과 숙연함을 받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이면 현종 왕 8년 1667년이다. 현종 왕이 1720년에 경덕궁에서 승하 하셨다.
성북동 향나무는 그 같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현종의 아들, 조선 제 19대 왕 숙종이 왕위에 오른 것도 알고 있었다. 조선 왕조 최대의 당파싸움인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당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도 알았다.
숙종은 당파간의 견제와 대립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문란해진 국가 재정구조를 개선하고 심화되어가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또한 즉위 이듬해에는 대흥산성의 완성 등을 통해 변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던 사실도 있다. 성북동 향나무는 그리 보면 몇 대의 왕들의 당파와 승하의 현장 소식을 늘 접했던 역사적인 나무다.
그 뿐 인가, 100m 근처에 살고 있었던 김재규의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도 속속들이 듣고 있었다. 향나무는 나에게 말한다. 역사는 늘 돌고 도는 것이다.
오직 예술만이 갈 길을 가고 있다고 했다. 향나무의 말은 나에게 교훈이다.
나에게도 돈을 버는 경영이나 학자의 길, 또는 대형 백화점의 운영같은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향나무의 교훈을 되새기며 한길만을 걷게 되었다. 나는 늘 이렇다 정원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속에든 이야기들이 줄지어 나오곤 한다. 다시 정원으로 돌아간다.
향나무의 역할은 크다. 이웃의 3층 넘어 보이는 시선도 막아준다. 건축의 고도제한은 12m다.
3층 건물은 14m인데 향나무가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고 있다.
높은 위치의 정원이기에 7m 높이의 키와 수평으로 10m를 덮은 넓은 모습은 이웃들에게는 맑은 공기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원의 온도가 도심의 온도에 무려 3도 정도를 낮추는 데 향나무의 역할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웃에서도 그러한 향나무의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
정원에는 또 다른 몇 그루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들의 나무들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75년 독일 유학중에 들여와 목포 갓바위 농장 울타리에 번식을 시켰다.
옆으로 퍼진 노란 향나무는 왕성하게 자라준 향나무를 서울 구경을 시키기로 하였다. 그것도 서울 문화의 거리, 대학로 하우스 옥상과 성북동 정원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물론 강한 종이지만 남다르게 신경을 써 주었다. 정원사로서는 향나무는 나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가지치기를 하여 크란츠, 공간장식, 테이블장식등과 크리스마스까지 다양하게 이용하는 나무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침엽줄기는 한겨울이 시작되는 11월부터 1월까지 꽃꽂이의 선으로 최강을 자랑하고 있다.
암컷의 향나무는 회색 열매가 열린다. 정원의 향나무는 워낙 왕성하여 아래서 자라는 진달래에 빛을 주기위해서는 많은 전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향나무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 경주에 가면 양동 마을이 있다.
옛날 양반들이 살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500년 된 천연기념물의 향나무도 있다.
고향 목포에는 친구 경진의 집이 당시에 목포에서는 비교적 큰 집이었다. 도심에 있는 경진의 집에도 수령이 오래된 향나무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산다는 집에서는 향나무를 심는 것이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래된 향나무와 오늘도 대화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