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 리더십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이동하고 있다.”
페루 수도 리마에서 열린 제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중국이 공개적으로 미국을 대신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경제 리더십을 이어받겠다고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 당선인의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로 발생하는 공백을 중국이 메우겠다고 자임한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20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19~20일 리마에서 열린 제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마바 미국대통령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쳤다.
시 주석은 트럼프 미국대통령 당선인이 내세우고 있는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빈자리를 중국이 메우겠다고 나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해서 미국이 세계 무역협정에서 전면 철수하는 건 아니라면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앞으로도 미국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 펼쳐진 시 주석과 오바마 대통령 간 외교전은 시 주석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우선 APEC 정상들은 그동안 중국이 심혈을 기울여온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에 공식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APEC 지역경제통합 의제를 보다 심화시키는 주요 수단으로서 FTAAP를 적극적으로 검토키로 한 것이다.
APEC 정상들은 ‘FTAAP 실현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전략적 공동연구’와 요약보고서'를 승인했다. 연구 진행을 위한 권고사항이 담긴 ‘FTAAP에 관한 리마선언’도 채택했다. TPP가 사실상 폐기될 위기에 처한 틈을 이용해 FTAAP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시 주석은 전날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보호무역주의 반대 입장을 피력하면서 중국 주도의 ‘양대’ 무역협정인 FTAAP 건설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APEC 정상회담은 그동안 TPP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해온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중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해외 정상회담이었다. 시 주석은 오바마의 퇴임과 함께 폐기될 것으로 전망되는 TPP의 빈자리를 중국이 채우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외부 세상에 문을 닫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제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미국 간 관계가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기간 중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고, 중국산 제품에 대해서는 45%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할 방침임을 밝혔었다.
시 주석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 간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양국 관계의 원만한 이양이 이루어짐으로써 상호 발전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APEC 정상들에게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해서 미국이 무역협정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건 아니라고 설득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APEC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TPP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반에서 미국의 위상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의 파트너들은 TPP와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밝혔다”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자유무역 기조에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 미국 노동자들이 보호를 받고 환경기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자유무역을 추구해야 한다”며 트럼프를 겨냥했다.
마이크 프로먼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미국은 항상 태평양 파워로 존재를 해 왔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지도자들은 트럼프 당선에 따른 보호무역주의 회귀를 크게 우려했다. 미국과의 새로운 협상 필요성을 제기하는가 하면 중국에 문호를 더 크게 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알프레도 손 페루 재무장관은 “가장 큰 궁금증은 앞으로 TPP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타진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미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미국이 주도해 온 TPP) 자유무역협정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만일 (트럼프 정부의) 미국이 참석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존의 협정내용을 개정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말콤 턴불 호주총리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TPP를 계속 이어나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턴불 총리는 “보호무역주의는 경기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다리가 아니다. 그것은 침체의 구덩이를 더 깊이 파는 삽일 뿐”이라면서 트럼프의 공약을 비판했다.
반면 존 키 뉴질랜드총리는 만일 트럼프가 TPP를 폐기하면 자신은 중국에 문을 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키 총리는 “TPP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보여주는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빠진다면 그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다. 중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카고대학 폴슨연구소의 에반 페이겐바움은 그동안 오바마 대통령의 역점사업이었던 ‘아시아 회귀’ 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날로 팽창하는 중국의 경제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지적했다. 페이겐바움은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TPP에서 손을 뗄 경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퇴조는 더욱 가속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이겐바움은 인도와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걸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패자(loser)다. 미국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규정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