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저녁의 광화문 시민시위는 지난주와 같이 ‘평화적 분노’의 양상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월요일 추미애 더불어 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 취소 소동으로 야권이 허점을 보이자 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정부 각 부처 임명장 수여, 정상외교 의지 표명, 부산 엘시티 사건 수사 지시 등의 행위를 보면 최순실 국정붕괴 사건이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와 다음주 구성될 특검에서 수사를 받을 대통령의 행동으로 봐주기 어렵다.
사인에 불과한 최순실 일당과 한 통속이 돼 정부 조직을 사유화하고, 사면권을 악용해 기업으로부터 환심을 사게 하는 등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헌정 문란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역 광장에선 박대통령 지지세력들이 총집결해 ‘박근혜 하야 반대’를 외치며 광화문 촛불집회 쪽으로 행진했다.
정홍원 전 총리 등 친박이라는 사람들은 “인민재판”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계엄령이 준비되고 있다”고 뚜렷한 근거도 없는 주장을 꺼냈다.
양측 간 일촉즉발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성격이 다른 두 집단은 법적 신고절차에 따라 집회 시위를 하는 만큼 법테두리 내에서 자기 의사를 민주적으로 표출하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
불법과 폭력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적이며 그 위에 세워진 질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촛불을 든 평화적 분노의 표시는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으로선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하야 거부가 확고한 만큼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청와대는 군과 경찰 등 공권력을 지휘하고 있다. 너나없이 무리수를 두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커진다.
야당의 하야투쟁은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 헌법 정신에 입각해 시간표를 짜고 탄핵절차에 들어가는 게 순리다.
국회는 반헌법적 사고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시위대 100만이 하야 외쳐도 지금은 6.10과 상황이 달라 대통령이 하야 거부하면 강제로 끌어 내릴 수 없고 탄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통령은 선출도 퇴출도 헌법적이어야 한다. 다만 하야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권리다. 대통령이 스스로 생각해 봐서 ‘고의로’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여기면 검찰이나 특검의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당장 하야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수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대통령이 범죄의 ‘고의’와 ‘심각성’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여긴다면 하야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이런 대통령을 국민이 용납할 수 없다면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지금은 1987년 6·10항쟁 같은 상황이 아니다. 6·10당시 서울과 서울 인근 군부대는 연일 충정훈련이라는 시위진압 훈련을 하고 있었고 투입될 지역에 대한 도상 연습까지 끝낸 상태였다.
총칼의 위협을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 나온 100만 명은 민의를 대변하는 100만 명이었다. 그들이 청와대 문을 부수고 들어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끌어 내린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론이 분분한 오늘날에 주말 시위 100만 명의 하야 함성은 아무리 자발적 참여자가 많다 해도 무작위 추출된 1000명의 여론조사보다도 민의를 더 정확히 대변하지 못한다.
하야와 탄핵을 분리한 여론조사에서 하야가 절반을 넘긴 적도 아직 없다.
그런데도 민의 운운하며 차벽을 뚫고 청와대로 쳐들어가 박 대통령을 끌어내린다면 그런 반헌법적 상황을 누가 보고만 있을 것인가.
박 대통령은 헌법적 절차에 따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다.
이런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것도 헌법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 야당이 제일 먼저 할 일은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거국내각 총리를 뽑는 것이다.
야당은 그런 다음,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열어 새 총리 후보에 대한 임명을 요청하고 헌법적 테두리에서 대통령이 퇴진하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새 총리와 박 대통령 사이에 조각을 비롯한 국정운영의 구체적 권한들을 나누고 조정하는 문제는 야당이 계속 개입해 정치적 대화를 해야할 사안이다.
이런 실질적인 권한이양의 준비와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저 광장에서 촛불만 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야당은 수권자격이 없다.
야당은 길게 봐야 한다. 최소 6개월 정도는 내다보는 눈이 필요하다. 내년 1월 말이면 트럼프 정부가 미국에 들어선다.
북한 김정은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러시아 푸틴 대통령 모두 스트롱맨들이다.
내우외환의 형세에 처한 우리나라를 야당이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지금은 국민이 박 대통령에게 화살을 쏘지만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면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모든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죽어서 사는 사즉생의 길이다.